▶ 말린 꽃으로 봄을 수놓는 압화 작가 – 신곡동의 정인화 작가 이야기
의정부시 신곡동의 한 아파트 단지 사이, 고요한 이면도로를 따라 걸으면 유리문 너머로 아늑한 빛이 새어 나오는 작은 공방이 있다. 화분에 심긴 들꽃들이 싱그럽게 얼굴을 내밀고, 벽면 곳곳엔 꽃잎이 유리액자 속에서 영원히 피어 있는 듯한 작품들이 걸려 있다. 이곳이 바로 압화(押花) 작가 정인화 씨의 ‘화화(花花) 공방’이다. 문을 열자 은은한 꽃향기와 함께 건조기에 눌려 있는 꽃잎들이 차분히 그녀의 시간을 말해준다.
정인화 작가는 ‘꽃을 누르는 일’을 단순한 취미가 아닌, ‘계절을 담는 작업’이라 말한다. 압화는 꽃을 눌러 건조하는 전통적 공예 기법으로, 옛날엔 꽃을 책 사이에 끼워두어 추억을 간직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의 압화는 그 이상의 작업이다. 꽃잎을 눌러 형태와 색을 보존하고, 이를 카드, 그림, 주얼리, 인테리어 소품 등으로 재해석하여 예술로 확장한다. “저에게 꽃은 그저 장식이 아니라, 시간을 기록하는 존재예요. 봄에 피었다 사라지는 짧은 생명을 눌러 담으면, 그 계절의 공기가 고스란히 남습니다.” 정 작가는 꽃잎 하나를 핀셋으로 잡으며 조용히 말했다.
그녀가 압화와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2012년의 일이다. 당시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그녀는 우연히 주민센터 문화 프로그램에서 ‘압화 체험 교육’을 접했다. 그저 새로운 취미를 찾아 등록한 수업이었지만, 그 만남은 인생의 방향을 바꿔놓았다. “첫 수업에서 코스모스를 눌렀는데, 눌린 꽃잎 사이로 섬세한 혈관 같은 결이 드러났어요. 그 안에 숨은 생명의 미학이 느껴졌죠. 그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이미 제 마음은 꽃 속에 있었어요.” 그녀의 회상 속엔 첫사랑을 떠올리는 듯한 미소가 번졌다.
정 작가의 압화 작업은 단순한 조형 미술을 넘어 ‘치유의 예술’에 가깝다. 대학 시절 낙상 사고로 크게 다쳐 오랜 시간 거동이 불편해진 아버지를 간호하던 시기, 그녀는 극심한 정신적 피로와 무기력감에 시달렸다. “아버지의 회복은 더디고, 제 마음은 말라가고 있었죠. 그때 문득 봄날 들녘의 민들레를 꺾어 노트에 눌러두었어요. 노란 꽃이 점점 바래가면서도 형태를 잃지 않는 걸 보고, 희한하게 위로가 되더군요.” 그렇게 시작된 꽃 누름은 서서히 그녀의 마음을 치유하는 힘이 되었다.
이후 정 작가는 전문적으로 압화를 배우며, 기술과 표현의 폭을 넓혀갔다. 꽃의 수분을 완벽히 제거하기 위한 건조 방식부터, 레진(resin)을 이용한 코팅 처리, 배경 색채의 조화 등 여러 실험을 거듭했다. 요즘은 지역에서 피는 제철 들꽃을 중심으로 작품을 만든다. 의정부 회룡산의 패랭이꽃, 부용천 주변의 노란 금계국, 민락동 밭두렁의 앵초꽃 등, 그가 사용하는 모든 소재는 ‘제 땅에서 자란 꽃’이다. “도시의 작은 틈에서도 피어나는 들꽃의 생명력이 참 신기해요. 비록 작지만, 그 안엔 견딘 시간이 스며 있거든요.”
정 작가의 작품은 자연의 원형을 존중하는 데서 출발한다. 화려하게 꾸미기보다, 꽃의 본래 형태와 색을 최대한 살려 눌러 담는다. 때로는 꽃잎 위의 점 하나, 줄기의 비틀림 하나도 그대로 남긴다. 그녀에게 그 불완전성은 오히려 ‘생명의 증거’다. “완벽한 꽃은 없어요. 그 자연스러움이 진짜 아름다움이에요.” 그 철학은 작품 전체에 고스란히 스며 있다. 투명한 유리 프레임 속에서 봄 들판의 공기가 살아 숨 쉬고, 누런 낙엽 사이의 들꽃은 계절의 순환을 이야기한다.
공방을 찾는 이들 중에는 정 작가처럼 마음의 위로를 찾는 이도 많다. 어떤 이는 반려견이 떠난 뒤 들판에서 꺾은 들꽃을 눌러 추억을 남기고, 또 다른 이는 결혼식 부케를 압화로 만들어 인생의 한 순간을 영원히 새긴다. 정 작가는 그들과 함께 꽃을 고르고, 눌러 말리고, 본을 뜨는 과정을 함께 나눈다. “꽃을 다루는 시간은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돼요. 그저 손끝으로 서로의 감정을 느끼죠. 그 시간이 제게도 큰 선물이에요.”
봄이 오면 그녀의 하루는 더 분주해진다. 아침이면 카메라와 가위를 챙겨 근처 야산과 도심 녹지대를 돌며 제철꽃을 채집한다. 그녀는 채집한 꽃의 이름과 위치, 날씨를 꼼꼼히 기록한다. 이런 과정은 단순한 자료 수집을 넘어 일종의 ‘꽃의 일기’가 된다. 오후에는 건조기에서 하룻밤 눌러둔 꽃잎을 꺼내어 작품 구성을 구상한다. 그녀의 손끝에서 들꽃들은 새로운 질서로 배치되고, 그 틈새로 햇빛이 스며든다. 이렇게 만들어진 한 장의 압화 작품에는 한 계절의 숨결이 고스란히 담긴다.
최근 정 작가는 압화를 단순한 공예에서 지역 예술로 확장하려는 시도를 이어가고 있다. 시민 대상 체험 프로그램을 열어 아이들에게 지역의 들꽃을 직접 눌러 작품을 만들어보게 하고, 환경의 중요성도 함께 이야기한다. “한 송이 꽃을 보존하려면 그 꽃이 자랄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해요. 압화는 결국 자연을 아끼는 마음에서 시작된 예술이거든요.” 그녀의 작품 전시회에서도 쓰레기 재활용 프레임, 지역 나무 조각을 활용한 액자 등 지속가능성에 대한 고민이 드러난다.
정인화 작가는 앞으로의 목표를 묻자 잠시 생각에 잠긴 뒤 이렇게 말했다. “궁극적으로는 ‘의정부의 사계절’을 압화로 완성해보고 싶어요. 봄의 개나리부터 겨울의 억새까지, 이 도시의 시간과 숨결을 담은 연작을 만들고 싶어요.” 그녀의 눈빛은 꽃잎처럼 맑고 단단했다.
혹독한 겨울을 견디고 피어나는 봄꽃처럼, 정인화 작가의 삶과 예술도 고난 끝의 생명력을 닮아 있다. 한 장의 압화 속에는 단순한 아름다움이 아닌 ‘견디고, 기다리고, 다시 피어나는 이야기’가 있다. 그녀는 오늘도 작은 공방 안에서 한 송이의 꽃을 눌러, 봄의 빛을 영원히 머물게 한다. 그렇게 세상의 잎은 말라도, 그녀의 공방 안에는 언제나 봄이 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