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의원 설립자 선우경식(鮮宇景植) 원장은 한국 현대 의료사에서 ‘무료병원’ 운동을 상징하는 인물로, 서울 영등포 쪽방촌과 신림동 달동네에서 20년 넘게 노숙인·극빈층·외국인 노동자에게 무상 진료를 이어간 의사입니다. 평생의 경력과 사회적 지위, 경제적 안정을 내려놓고 가난한 환자 곁을 지킨 삶 때문에 그는 ‘쪽방촌의 슈바이처’, ‘영등포의 슈바이처’로 불렸습니다.
성장 배경과 의사로서의 출발
선우경식 원장은 1945년 7월 31일 태어났으며, 해방 직후의 격변기와 전쟁·가난의 시대를 통과하며 성장했습니다. 학업 성적이 뛰어나 명문인 서울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이후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에 진학해 1969년 의사 면허를 취득했습니다. 가톨릭 신앙을 토대로 한 의과 교육은 훗날 그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의사’로 방향을 잡는 데 중요한 토양이 되었습니다.
의대를 마친 뒤 그는 일반적인 엘리트 코스를 따라 전문의 수련과 교수 경력을 밟습니다. 1975~1978년 미국 뉴욕의 킹스브룩 주이시 메디컬센터에서 일반내과학 전공의로 연수를 받으며 최신 의료 시스템과 진단·치료 기술을 익혔고, 귀국 후에는 한림의대 교수로 재직하며 안정된 학계 커리어를 쌓았습니다. 이 시기만 놓고 보면 그는 충분히 대형병원과 의대 교수로서 이름을 떨치며 안락한 삶을 이어갈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신림동 철거민촌에서의 전환점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 놓은 계기는 1980년대 초 신림동 철거민촌에서 이뤄진 의료봉사였습니다. 1982년 무렵부터 그는 주말마다 ‘사랑의 집’ 진료소에서 의료 자원봉사를 하며, 의료 사각지대에 놓인 도시 빈민을 직접 대면합니다. 당시 서울 외곽 달동네와 철거민촌에는 의료보험 가입조차 어려운 노동자·실직자·노숙인·일용직들이 밀집해 있었고, 병원을 찾지 못한 채 병을 키우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선우 원장은 주말마다 무료로 진료하면서도, 평일에는 대학에서 교수와 의사로 지내는 이중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에게 주말 봉사만으로는 이들의 생존을 지키기 어렵다는 한계가 뚜렷해졌습니다. 응급 상황이나 만성질환 관리, 약 처방과 재진, 상담 등은 한 번의 봉사로 해결되지 않았고, 상설 의료기관이 없다면 결국 환자들은 다시 병과 가난 속으로 방치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경험은 그에게 ‘주말봉사 의사’가 아니라, 삶의 방향 자체를 가난한 환자에게로 옮겨야 한다는 고민을 안겼고, 마침내 상설 무료병원을 만들겠다는 결단으로 이어졌습니다.
요셉의원 설립과 초기의 고난
1987년 8월 29일, 그는 뜻있는 후원인·사회사업가·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서울 관악구 신림1동 옛 동사무소 자리에 무료 진료소 ‘요셉의원’을 개원합니다. 병원 이름 ‘요셉’은 그의 세례명에서 따온 것으로, 가난한 이들을 돌본 성 요셉의 삶을 닮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습니다. 요셉의원은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 부설 자선의료기관으로 출발해, 초대 원장으로 선우경식이 취임하면서 ‘가난한 환자는 치료비가 0원’이라는 원칙을 세웠습니다.
초기의 병원 형편은 극도로 열악했습니다. 신림동 시장 2층의 허름한 건물에서 시작해 공간이 좁고 시설도 낡았으며, 약품과 의료기기 확보도 쉽지 않았습니다. 재정적으로 여유가 없었던 만큼, 약은 때로 해외 후원자를 통해 어렵게 들여와야 했고, 한 번 쓴 주사바늘을 소독해 다시 사용해야 할 정도로 절약에 절약을 거듭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환자 앞에서 이런 어려움을 내색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같은 수준의 진료를 제공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습니다.
처음에는 외부 후원금과 환자들이 내는 ‘조합비 형식의 소액 후원금’을 합쳐 병원을 운영했습니다. 그러나 1989년 전 국민 의료보험 제도가 전면 시행되면서 상황이 크게 달라졌습니다. 의료보험이 확대되자 일부 환자들이 일반 병원으로 옮겨 갔고, 조합비를 내던 회원들도 탈퇴가 이어지며 병원 재정이 불안해졌습니다. 이때 선우 원장은 병원의 정체성을 ‘절반은 유료, 절반은 무료’ 같은 타협이 아니라, ‘완전 무료병원’으로 재정비하는 쪽을 선택합니다. 그는 “가난한 환자는 하느님이 내게 주신 선물”이라고 말하며, 오히려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방향키를 꺾었습니다.
노숙인·쪽방촌·외국인 노동자를 향한 헌신
요셉의원은 신림동 달동네에서 10년간 활동한 끝에, 주변이 재개발되며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자 진료 대상이던 도시 빈민들이 다른 지역으로 밀려나게 되는 현실에 부딪힙니다. 선우 원장은 “병원이 사람 위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결국 병원 자체를 가장 소외된 이들이 밀집한 영등포 쪽방촌 인근으로 옮기는 선택을 합니다. 화려한 백화점과 쇼핑몰에서 불과 150m 떨어진 골목 뒤편, 2평 남짓한 쪽방들이 이어진 동네 한가운데에 요셉의원이 자리를 잡으면서, 그는 ‘영등포의 슈바이처’로 다시 불리기 시작합니다.
영등포 요셉의원은 노숙인, 일용직 노동자, 쪽방 주민, 알코올 의존 환자, 외국인 노동자 등 제도권 의료에서 가장 멀리 밀려난 사람들의 안식처였습니다. 병원은 진료비와 약값은 물론, 검사비와 각종 행정 비용도 받지 않는 구조였고, 하루 평균 수십 명의 자원봉사자와 20여 명의 의료진이 대가 없이 자신들의 기술과 노동을 나눴습니다. 선우 원장은 내과 전문의로서 진료를 보면서도, 병원 살림과 후원자 관리, 봉사자 조직 운영까지 직접 챙기며 일종의 ‘병원 공동체’ 리더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환자를 ‘시혜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이웃이자 자신을 변화시키는 존재로 바라보았습니다. 어느 기사에서 전해지는 그의 말, “가난한 환자는 하느님이 내게 주신 선물입니다”라는 표현에는, 가난한 이들을 통해 자신의 신앙과 직업 윤리를 다시 확인했다는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이 태도는 요셉의원이 단순한 무료진료소를 넘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존엄을 회복하는 공간으로 기능하게 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삶의 선택과 사회적 평가
선우경식 원장은 미국 대형병원에서 수련을 받고, 한국에서 의대 교수와 병원 내과 과장을 지낸 전형적인 엘리트 의사였지만, 그는 안정된 지위와 소득을 내려놓고 도시 빈민 곁에 머무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이 선택은 당시에도 큰 화제가 되었고, 의료계와 종교계, 시민사회에서는 그를 두고 “진정한 의미의 의사”, “낮은 곳으로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간 의사”라는 평가를 내렸습니다. 특히 의사 사회 내부에서는 “의료가 상업화되는 현실 속에서 의료의 본질과 사명을 되묻게 하는 존재”라는 반응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도, 자신의 삶을 특별한 희생으로 포장하기보다는 “주어진 소명을 따라간 것”이라고 설명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무료병원을 운영하는 동안 재정난과 인력난은 반복되었지만, 그때마다 교회와 후원자, 봉사자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이어졌고, 이를 두고 주변에서는 ‘요셉의원이 만든 기적’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런 흐름은 요셉의원이 단일 인물의 카리스마에 의존한 기관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을 위한 연대’의 플랫폼으로 자리 잡게 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그의 고등학교 동문들은 그를 기리기 위해 모교인 서울고등학교 교정에 그의 흉상을 세웠습니다. 동문회는 선우 원장이 영등포 요셉의원에서 21년간 노숙자와 쪽방촌 주민들을 돌보다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후배 학생들이 ‘성공’의 다른 기준을 상상해 볼 수 있기를 바란다고 밝혔습니다. 이렇게 그는 한 개인의 생애를 넘어, 교육 현장과 사회 전반에서 ‘어떤 삶이 가치 있는 삶인가’를 묻는 상징적 인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마지막 길과 남겨진 유산
선우경식 원장은 오랜 시간 과로와 스트레스, 열악한 환경 속에서 진료를 이어가다 위암 진단을 받았고, 2008년 4월 18일 지병을 이기지 못하고 6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는 선종 직전까지도 요셉의원과 환자들을 걱정했고, 병원 공동체가 흔들리지 않고 계속 가난한 이들 곁에 서 있기를 바랐다고 전해집니다.
그의 사후에도 요셉의원은 문을 닫지 않았습니다.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와 후원자들, 의료진과 봉사자들이 ‘선우경식의 뜻’을 이어가며 병원을 운영했고, 이후에는 ‘요셉나눔재단법인’ 설립을 통해 장기적인 운영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2022년에는 명동대성당에서 ‘선우경식 요셉 원장 기림 미사’가 봉헌되는 등, 그의 삶을 기리는 종교·사회적 기억도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요셉의원은 노숙인과 쪽방 주민, 외국인 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한 자선의료기관으로 기능하며, 설립자의 신념을 현재형으로 재현하고 있습니다.
그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은 ‘의료는 상품이 아니라, 생명과 존엄을 지키는 공공재’라는 메시지입니다. 선우 원장의 삶은 무엇보다 의사라는 직업의 사회적 책임과 윤리, 그리고 한 개인이 구조적인 불평등 속에서 어떤 위치를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습니다. 동시에, 그의 이야기는 자원봉사자·후원자·종교 공동체·시민사회가 함께할 때 한 도시의 가장 낮은 곳에서도 지속 가능한 돌봄 시스템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로도 평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