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수동 한복판, 오래된 인쇄 공장들이 카페와 레스토랑으로 변모하면서 ‘새로운 미식 지형’이 만들어지고 있는 곳에 최근 주목받는 레스토랑 ‘ㄹ’이 자리한다. 외관은 무심할 정도로 단정하다. 콘크리트와 철재의 질감을 거의 그대로 살려, 도시 생활의 거친 표면을 감추지 않는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공기에는 ‘조리의 질서’가 서려 있다. 오픈 키친 위로 낮은 온도의 조명이 깔리며, 셰프의 손끝에서 정교한 작업이 차분히 이어진다. 이곳을 이끄는 인물은 아일랜드 미슐랭 2스타 레스토랑 출신의 셰프, 테린 달인으로 알려진 브라이언 오도널. 그는 유럽 미식의 ‘입자적 완결성’을 한국적 정서 속에 다시 녹여내고 있다.
이 레스토랑의 핵심은 단연 ‘테린’이다. 테린은 프랑스 요리의 정통적 형태 중 하나로, 재료를 층층이 다져내어 형태와 맛을 동시에 구성하는 요리다. 보통 고기나 생선을 활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브라이언 셰프의 테린은 채소 중심이다. 무, 당근, 비트, 아스파라거스, 주키니, 셀러리, 버섯 등 일곱 가지 채소를 각각 다르게 손질해 절묘한 조합을 만든다. 각 채소는 찜, 구이, 절임 등 다른 조리법을 거쳐 고유의 식감과 풍미를 유지한다. 그런 뒤 얇게 저민 하몽으로 감싸고, 낮은 온도에서 오랜 시간 눌러 형태를 잡는다. 이 과정에서 하몽의 짠맛과 감칠맛이 채소의 단맛과 만나, 전혀 다른 층위의 맛이 형성된다. 단순한 ‘쌓기’가 아니라 ‘조율’의 미학이다.
접시에 담긴 테린은 시각적으로 매우 정돈되어 있다. 칼을 대면 단면이 마치 색채의 스펙트럼처럼 드러난다. 푸른 채소의 선명함이 오렌지색 당근의 단면과 대비를 이루고, 붉은 비트의 농도가 중심을 잡는다. 그 위에 얇은 하몽이 관능적인 윤기를 더한다. 이때 제공되는 육수는 또 하나의 층을 만들어낸다. 메추리 뼈로 우려낸 국물은 가볍지만 농밀하다. 일반적인 닭이나 소의 진한 스톡과 달리, 메추리 특유의 은은하고 단미한 향이 채소와 동일한 결을 이루며 ‘맛의 중심’을 잡아 준다. 김근호 셰프가 시식하며 가장 먼저 평가한 것도 바로 이 ‘균형감’이다. “자극적이지 않지만, 확실히 중심이 있다”는 그의 표현은 이 요리의 본질을 정확히 지적한다.
브라이언 셰프의 요리 철학은 복잡한 기술보다 ‘재료의 성격 이해’에 가깝다. 그는 인터뷰에서 종종 “재료가 가진 본성에 맞게 행동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말 그대로 이 테린에서는 각 채소가 자기 목소리를 잃지 않으면서도 조화롭게 공존한다. 다소 소박한 재료들로 만든 조합이지만,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에서 쌓은 ‘조리의 기하학’을 정확히 구현한 결과다. 특히, 채소의 결을 따라 칼질을 한 뒤 하몽으로 감싸는 과정은 매우 섬세하다. 결을 잘못 잡으면 단면이 흐트러지고 맛도 섞인다. 그는 이 요리를 “정확한 물리적 구조를 가진 음식”이라고 부른다. 즉, 모든 식감이 의도된 위치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테린 이후 나오는 스테이크, 뇨끼, 라자냐 등 다른 메뉴도 단정한 흐름을 유지한다. 스테이크는 유럽식 미디엄 레어의 전형을 따른다. 과도한 소스 대신 향긋한 허브 오일을 두르고, 질감이 살아 있는 채소 피클을 가니시로 곁들인다. 뇨끼는 이탈리아식이라기보다 현대적인 해석에 가깝다. 감자 대신 고구마와 파르메산 치즈를 배합해 좀 더 부드럽고 단맛이 도드라지며, 버터 세이지 소스로 마무리한다. 라자냐는 기존의 밀가루판 대신 얇게 썬 가지와 토마토를 층층이 쌓아서 ‘식물성 구조물’처럼 만들었다. 이 모든 요리는 ‘과하지 않음’이라는 키워드로 모인다. 미식의 세계에서는 종종 과도한 디테일이 완성도를 해치는데, 브라이언 셰프는 그 경계선을 정확히 지킨다.
이 공간을 방문한 김근호 셰프는 이전에도 광화문에서 ‘담백한 한 끼’를 소개하며 ‘절제된 요리’에 대한 철학을 언급한 바 있다. 이번 성수동의 ‘ㄹ’에서도 그는 비슷한 감상을 표현했다. “익숙하면서 낯선, 낯설면서 익숙한 맛.” 단순히 재료 조합의 새로움 때문만은 아니다. 그가 말하는 ‘낯섦’은 요리가 지닌 생각의 깊이, 즉 셰프가 쌓은 시간의 맛에 대한 반응이다. 김 셰프는 또한 “힘을 빼야 진짜 중심이 드러난다”고 덧붙였다. 이는 테린의 구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모든 것이 ‘단정하지만 불완전한 듯’ 보이지만, 그 모호함 속에서 진짜 풍미가 완성된다.
‘ㄹ’ 레스토랑의 공간 구성 또한 요리의 철학을 그대로 반영한다. 벽면에는 그림 한 점 없이 빛과 그림자의 간격만 존재한다. 테이블 간 간격이 넓어서 각각의 대화가 독립적으로 흐르고, 음악은 거의 들리지 않는다. 셰프가 요리의 식감에 집중하듯, 손님도 오롯이 맛에 집중할 수 있는 구조다. 특히 저녁 타임의 마지막 코스가 나올 때쯤이면 창밖으로 성수동의 불빛이 희미하게 스며들며, 도시의 시간과 식탁의 시간이 조용히 맞물린다. 그 순간, 브라이언 셰프는 손님에게 ‘완성된 균형’이란 무엇인지 보여준다.
결국 ‘ㄹ’의 테린은 단순한 요리를 넘어선다. 그것은 셰프의 경력, 재료의 탐구, 그리고 일상의 미학이 교차하는 결과물이다. 미슐랭 2스타 경력은 단지 타이틀이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쌓인 조리와 사고의 체계다. 김근호 셰프가 이를 ‘흐름이 있는 한 접시’라 표현한 이유는 명확하다. 맛이 단순히 입에서 스쳐 지나가는 감각이 아니라, 머릿속에 ‘이유 있는 질서’로 남기 때문이다. 성수동 ‘ㄹ’은 요즘의 화려한 다이닝 트렌드 속에서도 유독 차분하게 중심을 지킨다. 인위적인 화려함 대신, ‘맛의 구조’와 ‘시간의 리듬’을 통해 미식을 이야기하는 곳 — 그것이 바로 이 공간을 특별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