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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스케치 화가 정순옥

정순옥은 삶의 격랑을 통과해온 경험을 바탕으로, 내면의 기억과 감정을 추상적 회화 언어로 풀어내는 한국의 서양화가이자, 최근에는 재료 실험을 통해 존재와 상처, 자유를 탐구하는 작가로 평가받는다. 그는 늦은 나이에 본격적으로 화업에 뛰어들었지만, 이후 한국과 뉴욕을 오가며 왕성한 활동을 이어오며 ‘내면의 자유’를 향한 집요한 추구를 작품 세계의 핵심 주제로 삼아왔다.

생애와 배경

정순옥은 경남 마산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자연과 바람, 바다의 정서를 몸으로 체득하며 성장했다. 1959년 사라호 태풍이 거세게 몰아치던 날 태어났다 해서 ‘바람의 딸’이라는 별칭을 얻었는데, 이 극적인 출생의 기억은 이후 그의 회화에서 반복되는 바람, 휘몰아치는 선, 요동치는 색채 이미지와 맞닿아 있다. 그는 형제가 많은 집안의 막내딸로 자라나 가정 내 역할과 사회적 기대 사이에서 일찍부터 ‘제한된 자유’의 감각을 체험했고, 공무원으로 일하며 엄격한 조직문화 속에서 또 다른 형태의 속박을 경험했다고 회고한다. 이러한 개인사적 배경은 그가 그림을 선택한 동기와, 화폭에서 끝없이 ‘자유’를 요청하는 태도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

미술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비교적 늦은 시기였다. 그는 1983년 ‘그룹과 파트전’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1980년대 중반까지 ‘상지전’ 등 그룹전을 중심으로 자신만의 회화 언어를 모색해 나갔다. 이후 마산미술협회전, 여수·마산 교류전, 뉴욕·서울 순화 교류전 등 지역과 국제를 넘나드는 전시에 참여하면서 작가로서의 입지를 다져 나갔다. 불혹을 넘겨서야 안정된 가정을 꾸리게 되었고, 그는 스스로의 삶을 “사라호 태풍이 지나간 폐허 같은 고된 세월”에 비유하며, 이러한 체험들이 결국 추상 회화의 강렬한 에너지로 전환되었다고 말한다.

뉴욕 활동과 ‘늦깎이’ 작가 정체성

정순옥은 뉴욕으로 건너간 이후 뉴욕대와 뉴욕시립대(CUNY)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며 서양 회화와 현대미술 이론을 체계적으로 수학했다. 그는 한인 이민 1세대들이 치열한 생존 속에서도 자신만의 위치를 확보해 나가듯, 비교적 늦은 나이에 화단에 입문했음에도 누구보다 강한 생명력과 집념으로 작업에 매달리는 ‘늦깎이 작가’의 전형으로 소개된다. 미주 언론은 그를 “뉴욕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화가”라고 표현하며, 짧은 이민 역사 안에서 굳건한 작가적 정체성을 구축한 사례로 주목해 왔다.

그가 말하는 회화의 선택 이유는 분명하다. 그는 “형제 많은 집의 막내딸로서, 딱딱한 생활을 해야 하는 공무원으로서, 보이지 않는 속박을 받는 여성으로서의 한계를 넘어 내면세계의 자유를 얻기 위해 그림을 택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 언급에서 드러나듯, 정순옥에게 회화는 단순한 직업이나 취미가 아니라, 사회적·가부장적 구조가 부과한 역할에서 벗어나기 위한 탈주선이자, 자아 회복의 통로였다. 따라서 그의 작품 속 추상 형상과 격렬한 색채, 어딘가 미완의 감각을 남기는 화면 구성은, 자유를 향해 끊임없이 진동하는 내면의 상태를 시각화하려는 시도로 읽힌다.

뉴욕 시기 그는 ‘Landscape by Cell Cleavage’ 등 실험적인 전시에 참여하며, 풍경을 세포 단위로 분할하고 재조합하는 방식으로 회화적 공간을 해체·재구성하는 작업도 선보였다. ‘이미지 충돌과 내면 풍경’이라는 전시에 초청될 정도로, 그의 작업은 외부 풍경과 내면 심리의 충돌 지점을 탐색하는 것으로 평가되는데, 이는 이후 한국에서의 작업에서도 지속되는 중요한 축이다.

작업 방식과 회화적 특징

경남 마산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시기에, 그는 아크릴 물감과 먹물을 병용하는 독특한 기법으로 주목을 받았다. 미술평론가 김상곤은 그의 작업 과정을 “여러 물감 가운데 비교적 빨리 마르는 아크릴로 마티에르를 형성하고, 그 위에 갈아낸 먹물을 뿌린 다음, 다시 작품 구도에 맞는 자기만의 색을 찍어내는 방식”으로 설명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두 가지 상반된 재료, 즉 서양화 재료인 아크릴과 동양적 매체인 먹이 한 화면에서 긴장과 조화를 이룬다는 점이다. 이 결합은 동서양, 전통과 현대, 질서와 혼돈이라는 이중구조를 동시에 불러들이며, 작가가 삶에서 경험한 이질적 조건들의 공존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그의 화면에는 종종 ‘바람’의 이미지가 은유적으로 등장한다. 초기 글에서 평론가는 그의 그림을 “기억의 저편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되어, 성(城)의 노래가 되고, 가포의 시가 되며, 앙상블이 되어 미래를 향해 분다”고 묘사한다. 이는 구체적 사물 묘사보다, 기억·감정·시간이 뒤엉킨 흐름을 바람처럼 포착하려는 그의 화면 특성을 잘 보여준다. 바람은 형체가 없지만 흔적을 남기고, 보이지 않지만 흔들림으로 존재를 증명한다는 점에서, 그의 회화가 지향하는 ‘내면의 움직임’과 구조적으로 닮아 있다.

그의 추상 회화는 완전히 비정형적이라기보다, 감각적 리듬과 색면의 중첩 속에서 어렴풋한 형상과 구조가 드러나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붓질은 때로는 태풍처럼 거세게 휘돌고, 때로는 상처를 쓰다듬듯 부드럽게 내려앉는다. 이러한 화면의 호흡은, 인생의 고난과 치유, 긴장과 해방이 교차하는 작가의 경험과 깊이 연결돼 있으며, 관객에게도 정서적 공명과 해석의 여백을 남긴다.

관훈갤러리 개인전과 최근 경향

2026년 서울 인사동 관훈갤러리 전관에서 열린 ‘정순옥·신정아·손문일 개인전’은, 그가 재료와 주제를 한층 확장한 모습을 보여주는 자리였다. 전시 소개 글은 정순옥에 대해 “태어나자마자 인생의 열차에 올랐다. 숱한 고뇌와 사연을 간이역마다 싣고 내리며 예술을 탐했다”고 시작하며, 그의 삶과 예술을 하나의 여행 서사로 엮어낸다. 이 문장은 그의 작업이 특정 시기나 사건에 국한되지 않고, 지나온 모든 경험의 흔적을 화폭에 축적하는 과정이라는 점을 잘 상징한다.

이번 전시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재료에 대한 탐구다. 그는 가죽, 백토, 균열 패턴 등 회화의 전통적 평면을 벗어나 입체적, 물질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인다. 염색된 가죽 위에 형상을 더하고, 그 위에 떠오르는 감각을 따라 내면의 흐름을 시각화하는 방식은, 작업 과정 자체를 하나의 사유의 시간으로 전환한다. 손끝의 온기로 가죽을 물들이는 시간은 작가에게 과거와 현재를 길어 올리는 사색의 과정이며, 관객에게는 ‘촉각적인 회화’를 경험하게 하는 장치가 된다.

또한 백토 위에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갈라짐의 패턴을 ‘지문’처럼 고유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이 균열을 통제하지 않은 채 재료와 시간이 만드는 자율적 흔적을 존중하는 태도도 드러난다. 이는 작가가 자신의 삶에서 발생한 균열과 상처를 억지로 지우거나 통제하기보다,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그 안에서 새로운 의미와 아름다움을 발견하려는 철학과 맞닿아 있다. 균열은 더 이상 결함이 아니라, 빛이 스며드는 틈이자, 파편이 모여 새로운 온전함을 구성하는 출발점으로 재해석된다.

흥미로운 점은, 관훈갤러리 전시 글에서 ‘정장을 입은 익명의 인물들’과 ‘얼굴 없는 행인’에 대한 언급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 인물들은 사회가 요구하는 페르소나를 입고 살아가는 현대인의 초상으로 설정되며, 얼굴이 지워진 대신 정장과 포즈, 실루엣으로만 존재한다. 이는 작가가 개인의 내면과 사회적 역할 사이의 긴장을 여전히 중요한 주제로 삼고 있음을 보여주며, ‘내면의 자유’를 지향하는 초기 뉴욕 시기의 문제의식이 물질 실험과 결합해 다른 형태로 진화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주제 의식과 미술사적 의미

정순옥의 작업을 관통하는 핵심 개념은 ‘자유’와 ‘상처의 변형’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여성, 공무원, 막내딸, 이민자라는 다중의 정체성이 부과하는 제약 속에서, 회화를 통해 보이지 않는 속박을 가시화하고 해체하려 했다. 이는 단순한 자전적 서사에 머물지 않고, 현대사회가 요구하는 역할과 페르소나를 수행해야 하는 모든 개인의 상태로 확장된다. 관훈갤러리 전시에서 등장하는 얼굴 없는 정장 인물들은 바로 이러한 보편화된 자아의 풍경을 상징하는 장치다.

또한 그는 상처를 ‘균열’과 ‘흉터’의 이미지로 다루되, 그것을 파괴나 결핍이 아닌 또 다른 완전함의 출발점으로 재구성한다. 백토 위의 균열 패턴, 염색된 가죽의 얼룩, 먹물이 스며든 아크릴의 질감은 모두, 시간이 만들어낸 흔적과 상처가 새로운 미학적 질서를 이루는 과정으로 읽힌다. 전시 글은 “흉터가 아물어 딱지가 되듯, 상처는 치유의 과정 속에서 또 다른 완전함으로 변모한다”고 적고, ‘온전함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한다. 여기서 온전함은 매끈한 무결함이 아니라, 갈라진 틈 사이로 빛이 스며드는 상태, 파편이 모여 새로운 퍼즐을 이루는 순간으로 정의된다.

한국 미술사적 맥락에서 보면, 정순옥은 1980년대 이후 추상 회화의 흐름 속에서 개인의 서사와 재료 실험을 결합해온 작가군에 속한다. 동시에 뉴욕 유학 및 활동 경험을 통해 서구 현대미술의 언어를 체득하면서도, 동양적 매체인 먹, 백토, 균열, 지문 등의 모티프를 도입해 동서양 감각의 혼종성을 구현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이는 글로벌 시대 한국 작가들이 보여주는 이중 코드—국제적 언어와 지역적 정체성의 병치—의 한 사례로 읽을 수 있다.

결국 정순옥의 회화는 거대한 이론 체계나 거창한 상징 대신, 자신이 실제로 겪어온 고단한 삶, 이민과 노동, 젠더와 역할의 문제, 그리고 그 속에서 얻어낸 작은 자유의 순간들을 집요하게 들여다보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가 바람, 균열, 지문, 익명의 인물들을 반복해서 호출하는 이유는, 각자의 삶이 겪어온 상처와 흔적을 정직하게 마주하고, 그것을 통해 또 다른 형태의 온전함을 상상해 보자는 초대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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