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심 할머니의 50년 손맛, 남해의 바다를 품은 멸치 쌈밥
경상남도 남해군의 푸른 해안선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소박한 마을길 끝에 자리한 작은 밥집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간판에는 큼지막하게 “순심 할매 식당”이라고 적혀 있다. 겉모습은 화려하지 않지만,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은근한 된장 향과 함께 바다 내음이 코끝을 간지럽힌다. 이곳은 남해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거쳐 간다는 멸치 쌈밥의 성지, 바로 이순심 할머니(80)의 손맛이 깃든 곳이다.
할머니는 50년 전, 스무 살 갓 넘은 젊은 시절에 시어머니께 배운 손맛으로 식당 문을 열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오롯이 한 자리에서 식당을 지켜오며 남해 바다의 멸치를 쌈밥으로 빚어냈다. 할머니의 멸치 쌈밥은 단순한 ‘밥상 메뉴’가 아니다. 바다의 기운과 육지의 정성이 한데 어우러진 남해의 일상 그 자체다.
죽방렴 멸치의 진가, 500년 전통이 만드는 풍미
이 집 멸치 쌈밥의 첫 번째 비법은 ‘재료’다. 할머니는 “재료가 반이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신다. 특히 멸치는 아무거나 쓰지 않는다. 식당 뒤편 바다 바로 앞에 자리한 죽방렴에서 잡은 멸치만을 고집한다. 죽방렴은 조선시대 이전부터 남해에서 전해 내려오는 어로 방식으로, 대나무로 엮은 대형 그물틀을 바닷길에 설치해 조류에 따라 유입된 물고기를 잡는 방식이다. 인공 장비를 쓰지 않아 물살에 상처 입지 않고 살아 있는 상태로 잡히기 때문에, 멸치의 선도와 단맛이 일반 멸치와는 확연히 다르다.
죽방렴 멸치는 살이 단단하면서도 부드럽고, 익혀도 흐트러지지 않는다. 할머니는 새벽마다 직접 멸치를 골라낸다고 한다. “죽은 멸치는 절대 쓰면 안 돼. 냄새가 다르거든.” 이렇게 골라낸 신선한 멸치는 곧바로 소금물에 데쳐 비린내를 없애고, 된장과 갖은 양념을 더해 하루 정도 숙성한다. 그렇게 준비된 멸치는 쌈 채소 위에 올릴 때 이미 깊은 감칠맛을 머금고 있다.
된장 시래기와 쌈의 조화, 한입에 담긴 남해의 봄
멸치 쌈밥의 매력은 단순한 ‘쌈’이 아니다. 그 속에는 손이 많이 들어간 ‘된장 시래기’가 깔린다. 할머니는 매년 겨울이면 직접 재배한 무청을 삶아 말려두었다가, 봄이 되면 된장에 이틀 정도 숙성시킨다. 이렇게 만들어진 시래기는 질기지 않고 부드러우며, 된장의 구수한 맛이 스며들어 밥과 함께 먹을 때 고소한 향이 배어나온다.
쌈밥 상에는 죽방 멸치, 시래기된장무침, 각종 제철 나물, 그리고 마늘장아찌가 빼곡하게 차려진다. 상 위에는 초록빛 상추, 깻잎, 배추잎이 가득하고, 그 위에 밥 한 숟갈, 매콤한 양념에 버무린 멸치 한 점, 시래기 조금을 올려 한입 크게 싸서 먹으면 입안 가득 바다와 들의 향이 어우러진다. 짭조름하면서도 달큰한 멸치 양념, 구수한 시래기, 신선한 채소의 아삭한 식감이 삼합을 이룬다.
할머니는 손님들에게 꼭 마늘장아찌를 함께 곁들이라 권한다. 직접 담근 국산 마늘을 진간장, 고추, 사과즙으로 절여낸 것으로, 한입 베어 물면 알싸한 향이 혀끝을 깨운다. “이 장아찌 하나가 입맛 돌려준다 아이가.” 할머니의 말대로, 기름기 없는 멸치쌈과 어우러지면 밥 한 공기는 금세 없어진다.
식탁 위의 또 다른 별미, 멸치회무침
멸치 쌈밥과 나란히 주인공으로 자리 잡은 메뉴가 또 있다. 바로 멸치회무침이다. 죽방렴에서 잡은 멸치는 크기가 굵고 신선도가 높아, 손질만 잘하면 회로도 즐길 수 있다. 할머니는 새콤달콤한 자신만의 비법 양념장으로 멸치를 버무린다.
그 양념장은 고춧가루, 식초, 매실액, 다진 마늘, 청양고추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비율은 할머니만 안다. 멸치회무침은 단맛보다 새콤함이 중심이라 입안을 개운하게 해 준다. 쌈밥 한 숟가락 사이사이에 넣어 먹으면 느끼함이 전혀 없다. 손님들 중에는 이 회무침 하나만 따로 포장해 가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반찬 하나에도 깃든 손맛
순심 할머니의 식당에서는 밑반찬조차 구매한 것이 없다. 김치, 장아찌, 나물, 젓갈—all 손수 만든다. 김치는 남해 해안가 마을에서 전통 방식으로 절인 굵은 배추를 사용한다. 배추 속에는 멸치액젓 대신 멸치조림 국물을 약간 넣어 감칠맛을 더했다고 한다. 그래서 김치 맛이 남다르다. 새콤하면서도 깊은 맛이 있고, 멸치 쌈밥의 강렬한 풍미와도 균형을 이룬다.
할머니는 재료 하나하나를 “내 새끼 다루듯” 손본다고 한다. 마늘은 전부 국내산, 깨는 직접 볶은 것, 참기름은 마을 방앗간에서 짠 참깨로 만든다. 모든 과정이 느리지만, 그 느림이 바로 맛의 비결이다.
50년의 세월, 편지로 쌓인 시간
식당 안 벽면에는 각양각색의 편지들이 빼곡히 붙어 있다. 색이 바랜 종이에는 “할머니 건강하세요”, “그때 먹은 멸치쌈밥 맛을 잊을 수 없습니다”라는 손님들의 마음이 적혀 있다. 몇몇 편지는 외국에서 온 손님들이 영어로 쓴 내용이기도 하다. 할머니는 틈틈이 그 편지를 천천히 읽으며 마음의 힘을 얻는다고 한다.
“힘들 때마다 저 편지들 보면, ‘아, 그래도 내가 이 자리 지켜야지’ 하는 생각이 든다 아입니꺼.” 할머니는 허리를 살짝 펴며 웃는다. 그 웃음에는 지난 세월의 고단함보다 ‘지켜온 자부심’이 담겨 있었다.
할머니에게 50년은 단순한 시간의 흐름이 아니다. 매일 같은 자리에서 불 앞에 서서, 남해의 바다 냄새와 함께 음식을 만들어 온 나날이었다. “내가 멸치 쌈밥 만들다 죽을 끼야.” 이 말은 농담 같지만, 그 속에 담긴 장인의 의지는 진심이다.
남해 바다의 정직한 맛을 찾아서
순심 할머니의 멸치 쌈밥은 이제 남해를 대표하는 향토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관광객들은 물론, 전국의 방송팀들이 찾아와 카메라를 들이댄다. 하지만 할머니는 여전히 새벽 네 시면 식당 불을 켜고, 재료를 손질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남해의 바다는 그대로인데, 사람들의 발길은 더 많아졌다. 그래도 할머니는 여전히 옛날 방식을 고집한다. 500년 전통의 죽방렴에서 건져 올린 멸치, 직접 담근 된장과 김치, 직접 손질한 시래기와 마늘장아찌. 그 모든 것이 ‘순심 할매 식당’의 뿌리이자 미래다.
언제 찾아가도 변함없다. 문을 열면 들리는 소리, “어서 와요, 멸치 쌈밥 드실라요?” 그리고 따뜻한 미소. 그 한마디면 남해의 바다처럼 넓고 깊은 맛이 마음속까지 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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