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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신:합이합일 분이분일’ 회고전

호암미술관 《김윤신: 합이합일 분이분일》은 70여 년에 이르는 한국 1세대 여성 조각가 김윤신(1935–)의 생애와 작업을 한데 모은 첫 대규모 회고전으로, 나무와 더불어 살아온 한 예술가의 수행 같은 시간을 압축해 보여주는 전시입니다. 2026년 3월 17일부터 6월 28일까지 열리는 이 전시는 목조각을 중심으로 회화, 판화, 석조 작업 등 약 170여 점을 통해, 한국·프랑스·아르헨티나로 이어진 작가의 여정을 시간과 매질의 축 위에서 입체적으로 조망합니다.

전시 개요와 구성

이번 회고전은 호암미술관 1·2전시실 전체를 사용하는 규모로, 김윤신 예술 세계를 한 덩어리의 거대한 조각처럼 경험하도록 동선이 설계되어 있습니다. 입구에 들어서면 먼저 작가를 대표하는 목조각들이 압도적인 스케일로 관람객을 맞이하며, 이어서 초기 작업에서 최근작에 이르는 시기별·형식별 전개를 따라가도록 구성되어 있습니다. 전시는 단순한 연대기 배열이 아니라, 나무와의 관계, 신체와 토템, 자연과 영성, 회화와 조각의 상호 작용 같은 키워드를 중심으로 군집을 이루며, 각 섹션이 하나의 장(章)처럼 호응하는 구조를 띱니다.

전시의 부제이자 제목인 ‘합이합일 분이분일(合二合一 分二分一)’은 작가의 작업 이념에서 온 표현으로, 둘을 합하면 하나가 되고, 둘로 나누어도 결국 하나로 수렴한다는 역설적 문장을 통해 작가-재료-작품의 합일을 상징합니다. 호암은 이 문장을 작가의 전 생애와 작업을 관통하는 핵심 키로 설정하고, 평면과 입체를 일부러 뒤섞어 배치함으로써 ‘나무’라는 재료를 축으로 다양한 형식들이 하나의 조형 세계로 읽히게끔 유도합니다.

‘합이합일 분이분일’ 작업 이념

‘합이합일 분이분일’은 1970년대 후반부터 김윤신이 자신의 목조각에 반복해 붙여온 제목이자 평생의 조형 철학입니다. 작가는 나무를 자르고 깎는 데서 출발하기보다는, 오랜 시간 나무를 바라보고 만지며 그 안에 이미 잠재된 형상을 읽어내는 과정을 중시합니다. 이때 나무와 작가가 하나가 되는 상태를 ‘합(合)’, 그 합일의 상태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또 다른 존재인 작품을 ‘분(分)’으로 이해하면서, 둘의 합과 분리가 결국 하나의 생명적 에너지 위에서 이루어진다는 인식을 시적 문장으로 응축한 것이 바로 ‘합이합일 분이분일’입니다.

이 이념은 작업 방식에도 구체적으로 반영됩니다. 김윤신은 크로키나 모형, 설계도를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재료가 먼저 말을 걸어올 때까지 기다리는 방식을 고수해 왔습니다. 작가는 “재료가 먼저 말하게 하고, 나는 그 말에 귀 기울여 조금씩 도려내며 따라간다”는 태도로 일관해왔고, 그래서 완성된 조각은 작가의 자의적인 형상화라기보다 나무와 작가가 공동으로 빚어낸 ‘합작(合作)’에 가깝다는 인상을 줍니다. 작가 자신도 작업을 일종의 기도 행위로 이해하면서, 삶의 고난과 생존 의지, 영적 소망이 조각의 표면과 덩어리에 축적되었다고 말합니다.

작가의 생애와 예술적 여정

김윤신은 해방 직후의 혼란과 한국전쟁을 온몸으로 겪어낸 세대이며, “총알이 빗발치던 서울 거리에서 ‘살아야 한다’는 강렬한 의지를 품게 되었다”고 회상합니다. 이 강박에 가까운 생존 의지는 이후 그가 예술가로 버티며 살아가게 한 원동력이 되었고, 조각 역시 그 생존 의지의 형상화이자 기도처럼 작동합니다.

한국에서 조소를 공부한 뒤, 그는 보다 넓은 예술 세계를 향해 프랑스와 아르헨티나로 거처를 옮깁니다. 특히 아르헨티나에서는 40년 가까운 시간을 보내며 현지 나무를 재료로 작업을 이어갔고,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 토속적 신앙과 원시성에 대한 관심이 작업 안에 본격적으로 스며들었습니다. 이 시기, 그는 한국 미술계의 주류 조명에서는 상대적으로 비켜나 있었지만, 나무와 더불어 한평생을 보낸 조각가로서 자신만의 언어를 꾸준히 축적해 갔습니다.

2020년대에 들어서야 그의 예술적 위상은 한국 안에서 본격적으로 재조명되기 시작합니다. 2023년 남서울미술관 개인전과 2024년 베니스비엔날레 참여를 계기로, 한국의 1세대 여성 조각가이자 나무 작업의 선구자로서 국제적 인지도가 확대되었습니다. 그 연장선에서 기획된 호암미술관의 이번 회고전은, 90대에 접어든 작가에게 주어지는 일종의 ‘늦은 귀환’이자, 한국 조각사 속 그의 위치를 정식으로 자리매김하는 장으로 기능합니다.

주요 작품과 전시 감각

Sculpture by Kim Yun Shin

Sculpture by Kim Yun Shin 

전시에는 김윤신의 대표 목조각 연작을 비롯해 판화와 회화, 석조 작업 등 다양한 매체의 작품들이 한 공간에 호흡을 맞추고 있습니다. 나무 조각들은 토템을 연상시키는 수직의 형상, 사람과 짐승이 뒤엉긴 듯한 하이브리드한 신체, 기둥과 기호가 결합된 추상적 구조 등으로 변주되며, 표면에는 손으로 오랜 시간 다듬은 흔적이 고르게 배어 있습니다. 이 조각들은 전통적 목공예나 불교 조각과도 다른, 동시에 원시성과 현대성이 공존하는 조형 언어로 평가됩니다.

회화와 판화 작업 역시 흥미롭습니다. 평면 작업에서는 나무결 같은 선, 토템적 기호, 원시적 상징이 화면 전체에 리듬을 형성하며, 조각에서 보이던 형태적 실험이 평면으로 번역된 듯한 인상을 줍니다. 호암미술관은 이 평면 작업들을 조각과 섞어서 배치함으로써, 관람자가 ‘나무의 덩어리’와 ‘나무의 기억’을 동시에 경험하게 하는 장면을 연출합니다. 평면과 입체가 한데 얽힌 전시장 풍경은, 작가의 세계가 단일한 매체의 성취라기보다 하나의 거대한 조형 우주임을 강조하는 시각적 장치로 작동합니다.

전시 연출에서 특히 눈에 띄는 점은, 작품이 공간을 압도하기보다는 공간과 함께 호흡하도록 조율했다는 점입니다. 높은 천장과 자연광, 나무 바닥과 어우러진 작품들은 관람객에게 거대한 설치라기보다 숲속에 놓인 토템을 마주한 듯한 감각을 줍니다. 작품 사이의 간격도 넉넉히 두어, 각 조각이 지닌 기도와도 같은 에너지가 관람자의 동선을 따라 서서히 축적되도록 설계한 것이 느껴집니다.

한국 조각사 속 의미와 오늘의 시사점

호암미술관이 이번 전시를 ‘대회고전’으로 규정하는 데에는 분명한 미술사적 의도가 있습니다. 김윤신은 한국 1세대 여성 조각가로서, 남성 중심으로 기록된 한국 현대조각사에서 상대적으로 가려져 있던 인물입니다. 그가 한국·프랑스·아르헨티나를 오가며 일관되게 ‘나무’와 씨름해온 궤적을 한 번에 보여주는 이 전시는, 한국 조각사를 보다 입체적이고 다성적으로 읽어야 한다는 요구와 맞닿아 있습니다.

또한 ‘합이합일 분이분일’이라는 이념은 동시대의 환경·생태 담론과도 깊이 연결됩니다. 작가에게 나무는 단순한 재료가 아니라 생명과 영성을 간직한 존재이며, 인간과 자연이 서로 다른 둘이면서도 궁극적으로 하나라는 인식이 작업 전반을 관통합니다. 오늘날 기후 위기와 생태 전환이 중요한 화두가 된 상황에서, 1970년대부터 자연과의 합일을 조형 언어로 탐구해온 김윤신의 작업은 새롭게 읽힐 여지를 제공합니다.

마지막으로, 90대에 이른 작가가 여전히 작업을 이어가며 “나는 여전히 나를 찾는 중”이라고 말하는 태도는, 예술을 생애 전반에 걸친 자기 탐구와 수행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호암미술관 《김윤신: 합이합일 분이분일》은 단순한 회고를 넘어, 한 예술가의 치열한 삶과 그것이 남긴 형상들을 통해 ‘살아야 한다’는 의지, 그리고 인간과 자연, 예술이 어떻게 하나의 생명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묻는 전시로 읽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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