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

한국인의 밥상 깊고 진한 맛의 진수 어육장 천리장 윤왕순 명인장

전라북도 완주군 경천면의 한 고즈넉한 집 마당에는 언뜻 보기에는 평범한 시골집 풍경처럼 보이지만, 이 집만의 특별한 시간이 깊이 스며든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보통 장독은 햇볕과 바람이 잘 드는 마당 위 장독대에 줄지어 놓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 집의 장독은 땅속에 묻혀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보관 방식의 차이가 아니라, 수십 년을 넘어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귀한 장맛을 지키기 위한 지혜이자 삶의 방식입니다. 그 중심에는 파평 윤씨 가문에 전해 내려오는 특별한 내림장, 바로 어육장(魚肉醬)이 있습니다.

어육장은 이름 그대로 물고기와 고기를 함께 담아 오랜 시간 숙성시키는 귀한 전통 장입니다. 일반적인 간장이나 된장이 메주와 소금물만으로 발효되는 것과 달리, 이 집의 어육장은 땅과 바다, 들에서 얻을 수 있는 귀한 재료들을 모두 담아내는 것이 특징입니다. 소고기와 닭, 꿩 같은 육류 재료는 깊고 묵직한 감칠맛을 더하고, 숭어와 전복, 멸치, 홍합 등 바다의 산물은 풍부한 풍미와 짭조름하면서도 깊은 감칠맛을 만들어냅니다. 이러한 육해공의 재료들이 잘 띄운 메주와 함께 하나의 항아리 안에 담겨 땅속에서 무려 1년에서 2년 동안 천천히 익어갑니다.

땅속 숙성은 단순히 독특한 방식이 아니라 발효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전통의 지혜입니다. 계절에 따라 급격히 변하는 온도와 습도를 완충해 주는 땅은 항아리 안의 미생물이 보다 일정하고 깊은 발효를 이어갈 수 있도록 돕습니다. 여름의 뜨거운 열기와 겨울의 매서운 추위 속에서도 장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제 맛을 만들어갑니다. 그렇게 시간의 층위가 쌓일수록 장은 단순한 조미료를 넘어 한 집안의 역사와 기억을 품은 음식 문화로 거듭납니다.

이 집에는 어육장 외에도 특별한 장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천리를 가도 변하지 않는다’는 뜻을 지닌 천리장(千里醬)입니다. 이름만으로도 이 장이 얼마나 귀하고 오래 보존되는 장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먼 길을 가더라도 맛과 품질이 변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담은 천리장은 예로부터 귀한 손님 접대나 집안의 중요한 음식에 사용되던 장으로, 그 깊은 맛과 보존성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집안의 비법으로 전해 내려오며 가족의 밥상을 지켜온 장독 속에는 단순히 음식 재료가 아닌 세월과 정성, 그리고 가문의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이 장맛의 중심에는 올해 일흔여섯이 된 윤왕순 씨가 있습니다. 몸이 불편해 거동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도 그는 여전히 이 장들을 손에서 놓지 못합니다. 장을 담그고 돌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메주를 살피고, 소금물을 맞추고, 발효 상태를 확인하며, 때로는 달이고 덜어내는 과정까지 모든 것이 손이 많이 가는 일입니다. 그러나 윤왕순 씨에게 장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삶을 지탱해온 힘이었습니다.

해마다 반복되는 장 담그는 시간은 그에게 계절의 흐름을 느끼게 하고, 살아 있다는 감각을 다시 일깨워주는 소중한 의식과도 같습니다. 장이 익어가는 시간만큼 그의 삶 또한 천천히 깊어졌습니다. 고된 노동과 긴 기다림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 안에 어머니의 손맛과 집안의 역사가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장 담그는 날이 되면 동생들이 자연스레 곁으로 모여듭니다. 언니의 손발이 되어 무거운 항아리를 옮기고 재료를 다듬으며 함께 시간을 보냅니다. 이는 단순히 일을 돕는 차원을 넘어 가족의 기억을 함께 지키는 시간입니다. 힘든 줄 알면서도 예전에는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마음, 그리고 이제는 함께 짐을 나누려는 마음이 그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이 집은 동생들에게 다시 ‘친정’이라는 의미를 되찾았습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차려주던 따뜻한 밥상, 장 냄새가 은은하게 퍼지던 부엌의 기억은 이제 언니 윤왕순 씨의 손끝에서 다시 살아납니다. 장맛은 그렇게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지며 가족의 정체성을 만들어갑니다.

이 귀한 장들은 밥상 위에서 더욱 빛을 발합니다. 어육장으로 깊은 맛을 낸 어육장콩비지돼지등뼈탕은 진하고 구수한 국물 속에 육류와 해산물의 풍미가 겹겹이 쌓여 깊은 감칠맛을 냅니다. 한 숟가락 뜨는 순간 입안 가득 퍼지는 묵직한 맛은 오랜 숙성의 시간을 고스란히 전합니다. 향긋한 달래를 넣어 만든 달래어육장은 봄의 향기와 깊은 장맛이 어우러져 입맛을 돋우고, 시래기밥은 장의 구수함과 시래기의 담백함이 만나 소박하면서도 깊은 풍미를 완성합니다.

또한 천리장으로 무쳐낸 천리장닭무침은 이 집만의 별미입니다. 닭고기의 담백함 위에 천리장의 깊고 짭조름한 맛이 더해져 오래 기억에 남는 풍미를 선사합니다. 이는 단순한 한 끼 식사가 아니라 한 사람의 삶과 한 가족의 기억이 녹아든 밥상입니다.

결국 이 집의 장독 속에서 익어가는 것은 장만이 아닙니다. 윤왕순 씨의 삶, 가족의 시간, 어머니의 기억, 자매의 정, 그리고 세월 속에서 더욱 단단해진 사랑이 함께 익어갑니다. 음식도 인생도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시간을 들여야 비로소 깊은 맛을 내듯, 이 집의 밥상은 그렇게 한 사람의 인생을 담아 오늘도 조용히 무르익고 있습니다. 장독 속에서 조용히 익어가는 시간은 곧 한 가족의 역사이며, 삶의 맛 그 자체입니다.

“이 포스팅은 쿠팡 파트너스 활동의 일환으로, 이에 따른 일정액의 수수료를 제공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