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의 한 고즈넉한 마을에는, 계절의 볕과 바람을 온전히 품으며 오랜 시간을 견뎌온 장독대가 장관을 이루는 집이 있습니다. 무려 1,000여 개에 달하는 장독이 마당과 담장 너머까지 빼곡히 자리한 이곳은 단순히 장을 담그는 공간이 아니라, 한 집안의 역사와 세월, 그리고 삶의 철학이 고스란히 숙성되는 살아 있는 시간의 장소입니다. 이 집의 중심에는 67세의 조정숙 씨와 31세의 딸 변수정 씨가 있습니다. 모녀는 매년 이맘때가 되면 가장 바쁜 시간을 보냅니다. 장을 담그고, 가르고, 돌보고, 기다리는 긴 과정 속에서 한 집안의 전통과 맛을 이어가기 때문입니다.
조정숙 씨는 종갓집에 시집와 시어머니로부터 무려 100년의 역사를 지닌 씨간장을 물려받았습니다. 씨간장은 단순한 간장이 아닙니다. 오랜 세월 동안 해마다 새로 담근 장에 덧붙여 이어지는 ‘집안의 생명’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수십 년, 길게는 백 년 이상 이어진 씨간장은 그 집안만의 고유한 미생물 환경과 손맛, 그리고 기후와 시간의 흔적을 담고 있습니다. 조정숙 씨는 시어머니에게서 배운 방식 그대로, 해마다 햇장에 씨간장을 더하는 ‘첨장(添醬)’ 방식으로 집안의 장맛을 이어왔습니다. 첨장이란 오래된 씨간장을 새로 담근 장에 더해 발효의 중심축을 잡아주는 전통 방식으로, 시간이 축적될수록 더욱 깊고 복합적인 풍미를 만들어냅니다.
이 과정은 결코 간단하지 않습니다. 장을 담그는 일은 단순히 음식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한 해 농사를 짓는 일과 맞먹는 큰일입니다. 먼저 장독을 준비하는 것부터 시작됩니다. 오래된 항아리는 짚불로 정성스럽게 소독합니다. 짚을 태운 불길과 연기는 항아리 속 잡균을 제거하고, 동시에 자연적인 살균 효과를 더해 장이 건강하게 익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듭니다. 전통 방식에서 짚은 단순한 재료가 아니라 발효의 핵심 요소 중 하나입니다. 짚에 서식하는 유익한 미생물은 장의 깊은 풍미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후 메주를 준비합니다. 잘 삶은 콩을 곱게 찧어 벽돌 모양으로 빚은 뒤, 따뜻한 곳에서 말리고 띄우는 과정을 거칩니다. 메주가 잘 뜨기 위해서는 온도와 습도, 통풍이 절묘하게 맞아야 합니다. 너무 습하면 곰팡이가 과하게 피고, 너무 건조하면 발효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습니다. 이 과정에서 조정숙 씨는 수십 년간 쌓아온 경험으로 날씨의 변화를 읽고, 메주의 상태를 눈과 손으로 살핍니다. 이제 딸 변수정 씨도 그 옆에서 어머니의 손길을 따라 하나씩 배우고 있습니다.
소금물을 내리는 일 또한 장맛을 좌우하는 핵심입니다. 물과 소금의 비율은 계절의 기온과 습도, 메주의 상태에 따라 미세하게 달라집니다. 소금이 너무 많으면 발효가 더디고 짜기만 한 장이 되며, 너무 적으면 쉽게 상할 수 있습니다. 오랜 경험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메주를 항아리에 차곡차곡 담고 정성껏 소금물을 부은 뒤, 장독은 다시 햇볕과 바람 속으로 놓입니다.
두 달 남짓 시간이 흐르면 가장 중요한 날, 바로 장을 가르는 날이 찾아옵니다. 이 날은 단순한 작업일이 아니라 집안의 큰 의식과도 같습니다. 항아리 속에서 충분히 익은 메주를 건져내 으깨면 구수하고 진한 된장이 됩니다. 맑게 걸러진 장물은 햇간장, 즉 햇장이 됩니다. 이렇게 탄생한 햇장은 시간이 흐르며 더욱 깊은 맛을 갖게 됩니다.
햇간장은 숙성 기간에 따라 여러 단계로 나뉩니다. 비교적 맑고 가벼운 맛의 청장(맑은 간장)은 나물무침이나 국, 조림에 쓰기 좋습니다. 시간이 더 지나면서 색과 맛이 짙어지면 진장이 됩니다. 진장은 풍미가 깊고 감칠맛이 강해 육류 요리나 오래 끓이는 조림 요리에 탁월합니다. 씨간장을 중심으로 해마다 새 생명을 더하며 이어지는 이 과정은 마치 가족의 역사가 쌓이는 모습과도 닮아 있습니다.
이렇게 정성으로 빚어진 장맛은 종가의 밥상 위에서 진가를 발휘합니다. 대표적인 음식으로는 ‘된장깻잎나물찜’이 있습니다. 은은하게 퍼지는 된장의 구수함과 깻잎 특유의 향긋함이 어우러져 깊은 풍미를 냅니다. 한입 베어 물면 짭조름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입안 가득 퍼지며 봄의 향을 느끼게 합니다.
‘전복소고기진장조림’은 종가의 품격을 보여주는 음식입니다. 진장으로 천천히 졸여낸 소고기와 전복은 윤기가 흐르며 깊은 갈색 빛을 띱니다. 간장의 단맛과 짠맛, 그리고 오래 숙성된 발효 향이 어우러져 재료 본연의 맛을 한층 끌어올립니다. 귀한 손님상이나 집안의 중요한 날에 오르는 음식으로 손색이 없습니다.
또 다른 별미인 ‘간장육전’은 얇게 저민 고기에 청장과 진장을 적절히 섞어 밑간한 뒤 부쳐낸 음식으로, 부드러운 식감과 은은한 감칠맛이 특징입니다. 단순한 육전과 달리 오랜 세월 숙성된 간장이 들어가 풍미의 깊이가 남다릅니다.
무엇보다 이 이야기의 중심은 장맛만이 아니라, 그 장맛을 닮아가는 모녀의 시간입니다. 어머니 조정숙 씨가 시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씨간장을 이제는 딸 변수정 씨가 함께 지키고 있습니다. 장을 담그는 일은 고되고 긴 시간을 요구하지만, 그 속에는 가족의 역사와 사랑, 그리고 전통을 잇는 책임감이 담겨 있습니다.
씨간장은 단순히 오래된 간장이 아니라 세대를 이어주는 매개체입니다. 해마다 새로운 장에 더해지며 새 생명력을 얻고, 동시에 지난 세대의 기억을 품습니다. 그렇게 항아리 속에서 익어가는 장처럼, 모녀의 관계 또한 세월 속에서 더욱 깊고 단단해집니다. 충북 청주 내수읍의 이 장독대는 오늘도 묵묵히 시간과 계절을 담아내며, 백 년을 이어온 종가의 맛과 이야기를 다음 세대로 전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