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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의 방주 프로젝트

맛의 방주(Ark of Taste) 프로젝트는 산업화와 세계화 속에서 사라져가는 지역의 전통 식재료와 음식을 ‘기록하고, 알리고, 다시 먹이기’ 위해 만들어진 국제 슬로푸드 운동의 핵심 프로젝트입니다. 특히 한국에서는 토종 종자·향토 음식·섬·섬처럼 고유한 식문화가 빠르게 사라지는 현실에서 이를 되살리고 지역 경제와도 연결하려는 실천 운동으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맛의 방주란 무엇인가

맛의 방주는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슬로푸드 운동이 운영하는, 멸종 위기에 처한 유산 식품(heritage food)의 국제 카탈로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유산 식품은 단순히 오래된 음식이 아니라, 특정 지역의 역사·문화·환경·생태와 긴밀히 얽힌 전통 작물, 가축 품종, 가공식품, 조리법 등을 모두 포함합니다. 이 프로젝트는 노아의 방주에서 이름을 빌려, 사라져가는 맛들을 ‘방주’에 태워 인류의 식문화 유산으로 보존하자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다만 박물관처럼 유물을 유리관 속에 넣어두는 보존이 아니라, 사람들이 실제로 재배·생산·소비를 지속함으로써 살아 있는 문화로 지키자는 점이 핵심입니다.

슬로푸드 국제본부와 산하 생물다양성 재단은 “극적인 속도로 진행되는 종다양성의 손실을 멈추기 위한 도구”로 맛의 방주를 설계했습니다. 현대 농업과 식품 산업은 소수 품종과 대량 생산 시스템에 의존하는데, 그 결과 전통 종자, 토종 가축, 지역 발효식품 등 수많은 고유한 먹을거리가 시장에서 밀려나고 있습니다. 맛의 방주는 이처럼 ‘소멸 위기’에 놓인 품목을 찾아 목록화하고, 그 가치를 세계에 알리며, 생산자와 소비자가 다시 연결되도록 돕는 일종의 글로벌 데이터베이스이자 사회 운동의 플랫폼입니다.

등재 기준과 방식

맛의 방주에 오르기 위해서는 몇 가지 명확한 기준을 충족해야 합니다. 첫째, 해당 품목이 특정 지역의 문화·역사·전통과 깊게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특정 마을의 제사 음식, 특정 섬에서만 이어진 염장·발효 기법, 특정 지역 농민들이 세대 대대로 지켜온 토종 종자 등은 모두 이 기준에 부합합니다. 둘째, 산업화·환경 파괴·법·규제·소비 변화 등으로 실제 소멸 위험에 처한 품목이어야 합니다. 이미 널리 상업화되어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식품은 대상이 아니며, 주로 시장에서 밀려났거나 생산 규모가 매우 작은 품목이 중심이 됩니다.

셋째, 그 품목이 ‘좋고, 깨끗하고, 공정하다’는 슬로푸드의 가치에도 부합해야 합니다. 즉, 맛과 품질이 뛰어나고, 환경을 심각하게 해치지 않으며, 생산자와 지역 공동체에게도 의미 있는 가치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기준을 검토하기 위해 1997년 이탈리아에서 과학위원회(Scientific Commission of the Ark)가 구성되었고, 여기서 전 세계에서 올라오는 후보 품목을 심사합니다. 특정 국가나 지역에서는 슬로푸드 지부와 연구자, 지자체, 농민 단체 등이 함께 후보를 발굴해 자료를 만들고, 국제 본부에 등재 신청을 올리는 과정을 거칩니다.

등재 방식 또한 단순히 이름만 올리는 작업이 아닙니다. 품목의 이름, 산지, 역사, 전통적인 생산·조리 방식, 관련된 민담·의례·문화적 맥락, 현재의 생산 여건과 위기 요인 등을 상세하게 기록합니다. 이 정보는 슬로푸드 국제 생물다양성 재단 사이트와 각국 슬로푸드 단체의 플랫폼에서 누구나 열람할 수 있도록 공개됩니다. 이 과정에서 과학적 자료뿐 아니라 생산자 인터뷰, 사진·영상 기록 등이 함께 축적되며, 그 자체가 하나의 지역 음식 아카이브로 기능하게 됩니다.

한국에서의 전개와 의미

한국에서 맛의 방주 등재 작업은 2013년을 전후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초기에 연합뉴스가 보도한 등재 품목을 보면 제주 서귀포 푸른콩장, 경남 진주 앉은뱅이밀, 충남 논산 연산오계, 토종 한우 칡소, 경북 울릉 섬 식재료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토종 종자나 토종 가축, 혹은 특정 지역에만 전승되어 온 발효·가공 식품으로, 당시에도 이미 생산자 고령화, 농지·어장 환경 변화 등으로 지속 가능성이 위태로웠던 품목입니다.

국제슬로푸드한국협회와 지역 슬로푸드 지부, 지자체는 이후 꾸준히 후보를 발굴해 등재를 확대해 왔습니다. 2025년 2월 기준으로 한국에서 맛의 방주에 오른 품목은 123개에 이르며, 이 중 제주도가 31개로 가장 많은 등재 수를 기록하고, 울릉도가 12개로 그 뒤를 잇습니다. 제주가 압도적으로 많은 이유는 슬로푸드 제주지부의 적극적인 활동과 제주도청의 정책적 지원이 결합되었기 때문이며, 울릉도 역시 슬로푸드 울릉지부와 울릉군의 지원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이처럼 맛의 방주 프로젝트는 단순한 문화운동을 넘어, 지방정부 정책과 지역 경제 전략에까지 연결된 사례를 보여 줍니다.

한국의 등재 목록을 보면 감태지, 나주 제비쑥떡, 낭장망 멸치, 김해 장군차, 누룩 곡물 발효식초, 다금바리(자바리), 제주 재래감, 골감주, 토하, 담양 토종배추, 섬말나리, 어간장과 어육장, 제주 푸른콩장, 제주 꿩엿, 제주 흑우, 칡소 등 매우 다양한 범주의 품목이 포함됩니다. 여기에는 전통 발효 식초와 술, 떡과 엿 같은 가공식품, 토종 채소와 과실, 해조류, 어패류, 토종 소와 닭까지 포괄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맛의 방주 프로젝트는 농업·어업·축산·식품가공·조리 문화 전반을 아우르는 입체적인 ‘식문화 지도’를 그려 나가고 있는 셈입니다.

사회·경제·생태적 효과

맛의 방주 프로젝트의 첫 번째 효과는 생물다양성과 식문화 다양성을 동시에 지킨다는 데 있습니다. 토종 종자와 토종 가축을 보존하는 일은 단순히 과거의 유산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기후위기와 식량위기 시대에 유전적 다양성을 확보해 미래의 농업·식량 시스템을 더 탄탄하게 만드는 전략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특정 토종 작물은 가뭄·염분·한랭 등 산업 품종이 버티기 어려운 환경에서도 잘 자라는 특성을 지닐 수 있고, 토종 가축은 지역 질병에 대한 저항성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특성은 장기적으로 볼 때 국가 식량 주권과 직결되며, 맛의 방주는 이런 유전자 자원의 존재를 사회적으로 인식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둘째, 지역 경제 활성화 측면에서 맛의 방주는 매우 실질적인 도구로 활용됩니다. 어떤 식재료나 음식이 국제 슬로푸드 생물다양성 재단의 인증을 받아 ‘맛의 방주’에 등재되면, 해당 지역은 이를 스토리텔링 자원으로 삼아 관광·브랜딩·로컬푸드 사업을 기획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울릉도에 등재된 대황·두메부추·부지갱이·특정 향토 찌개는 울릉군이 추진하는 로컬푸드·관광 상품과 연계되어, “울릉도의 맛의 방주를 찾아서”와 같은 미식 여행 코스로 개발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국제슬로푸드한국협회는 맛의 방주 교육과 토종 미식 홍보를 통해,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는 데 프로젝트를 적극적으로 연결하겠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셋째, 생산자 관점에서 맛의 방주는 자긍심과 연대의 기반이 됩니다. 소규모 농부나 장인들은 자신들의 전통 방식이 ‘낡은 것’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인정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며, 이는 다음 세대에게 기술과 토지를 물려줄 동기를 부여합니다. 또한 같은 품목을 생산·가공하는 이들이 지역·국가·국제 단위에서 네트워크를 형성하면서, 품질 기준과 가격, 판로를 함께 논의하고 협력하는 구조가 생겨납니다. 이런 움직임은 대기업 중심의 식품 유통 구조에 대응하는 대안적 식품 체계를 만들고, 더 공정한 수익 배분을 가능하게 할 수 있습니다.

넷째, 소비자에게는 맛의 방주가 ‘새로운 맛을 발견하는 지도’가 됩니다. 슬로푸드가 개최하는 살로네 델 구스토(Salone del Gusto)와 테라 마드레(Terra Madre) 같은 국제 행사에서는 맛의 방주를 주제 공간으로 설정해, 전 세계에서 온 품목을 전시·시식·워크숍으로 체험할 수 있게 합니다. 소비자는 여기서 처음 접하는 이름의 치즈, 곡물, 술, 발효식품을 맛보며, 그 뒤에 있는 생산자와 지역 이야기를 함께 듣게 됩니다. 이 경험은 “싸고 편한 것” 위주의 소비 패턴에서 벗어나, “이 음식이 어디에서, 누구에 의해,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졌는가”를 묻는 감수성을 키우는 계기가 됩니다.

앞으로의 과제와 한국적 가능성

맛의 방주 프로젝트는 전 세계적으로 수천 개의 품목을 등재했지만, 여전히 시작 단계에 가깝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산업화와 기후위기로 사라지는 속도에 비하면, 기록과 보존의 속도가 따라가지 못한다는 문제의식입니다. 한국만 보더라도 123개 품목이 등재되었지만, 실제로는 각 지역에 수백, 수천 개의 토종 종자·향토 음식이 존재하거나 과거에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문헌·구술 기록·지방지 등을 더 촘촘히 조사하고, 고령 농민·어민·장인들의 기억을 체계적으로 수집하는 작업이 병행되지 않으면, 맛의 방주에 실어 보기도 전에 많은 품목이 자취를 감출 수 있습니다.

또한 등재 이후의 ‘사후 관리’ 역시 중요한 과제입니다. 리스트에 이름이 올라가는 것만으로 자동 보존이 보장되지는 않기 때문에, 실제 재배·사육·생산·판매까지 이어지는 경제적 선순환 모델을 만드는 정책과 시장 전략이 필요합니다. 지자체와 중앙정부가 공공급식·로컬푸드 직매장·관광·문화 정책과 맛의 방주 품목을 연계할 수 있다면, 생산자에게 안정적인 수요를 제공하면서도 시민들에게 더 다양한 음식을 경험할 기회를 줄 수 있습니다. 교육 측면에서는 학교 급식과 교과 과정, 미디어 콘텐츠, 지역 축제 등에서 맛의 방주 이야기를 풀어내어, 다음 세대가 ‘토종’과 ‘전통’을 박제된 유물이 아닌, 현재형의 삶과 연결해 이해하도록 돕는 노력이 요구됩니다.

한국의 경우 특히 섬·산간·도서·접경 지역 등에서 독특한 식재료와 조리법이 집중적으로 발견되기 때문에, 이런 지역을 중심으로 한 ‘맛의 방주 로드맵’을 그려 보는 것도 의미가 큽니다. 제주·울릉처럼 이미 다수 등재가 이뤄진 지역 외에도, 서해·남해의 작은 섬, 강원·경북 산간 마을, 접경지역 농촌 등은 앞으로의 조사와 등재가 기대되는 공간입니다. 동시에 도시에서도 전통시장의 노포, 특정 이주민 커뮤니티가 지켜온 음식 문화 등 새로운 형태의 ‘도시형 맛의 방주’ 후보를 발굴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맛의 방주는 단지 옛날 음식을 복원하는 프로젝트가 아니라, 21세기 한국 사회가 스스로의 정체성과 미래 농·식·경제 전략을 재설계하는 거울로도 활용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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