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종계는 한국 양념치킨과 치킨무를 ‘처음으로’ 상업적으로 정립해낸 외식업자이자 맥시칸치킨 창업주로,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먹는 K-치킨의 원형을 만든 인물이다. 한국 치킨 산업에서 그가 만든 레시피와 조리법, 프랜차이즈 모델은 사실상 표준처럼 자리 잡았고, 이후 수많은 브랜드와 메뉴가 그의 궤적 위에서 성장했다.
어린 시절과 인쇄소 사장의 몰락
윤종계는 1952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한국전쟁 시기와 맞물린 가난한 환경에서 성장했지만, 젊은 시절에는 치킨과 전혀 상관없는 인쇄소를 운영했다. 그는 인쇄업을 통해 자리를 잡으려 했으나, 경영 악화로 결국 부도를 맞게 되고 이 실패가 그의 인생 경로를 완전히 바꾼 전환점이 된다. 사업 실패 이후 그는 다시 생계를 꾸려야 했고, 선택한 돌파구가 바로 대구 효목동의 작은 통닭집이었다.
1970년대 말, 그는 대구 동구 효목동에 2평 남짓한 ‘계성통닭’을 열며 외식업에 뛰어든다. 공간은 좁았지만, 당시만 해도 프라이드치킨은 생소하면서도 점차 대중화되던 음식이었고, 그는 “어떻게 남들과 다른 맛을 만들 것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하는 소상공인 창업자였다.
‘퍽퍽한 닭’에서 시작된 문제의식
윤종계가 양념치킨을 개발하게 된 출발점은 발상의 전환이라기보다 ‘불만족스러운 식감’이었다. 그가 기억한 초창기 고민은 “치킨 속살이 너무 퍽퍽하다”는 것이었다. 손님들은 처음에는 맛있게 먹다가도 중간쯤에서 젓가락을 놓았고, 이유를 물어보면 “닭 비린내가 나고, 속살이 퍽퍽해 먹기 힘들다”고 말하곤 했다.
그는 비린내를 잡고, 퍽퍽함을 줄이며, 동시에 한국인 입맛에 맞는 새로운 풍미를 만드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처음 떠올린 해법은 한국인에게 가장 익숙한 양념인 김치 양념이었다. 김치와 비슷한 개념의 양념을 치킨에 입히면 맛있을 것이라는 기대였지만, 실제 조합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이때 전환의 계기가 된 것이 바로 ‘동네 할머니의 한마디’다. 그는 효목동 작은 가게에서 매일같이 새로운 레시피를 시험하다가, 지나가던 할머니로부터 “밀가루에 물만 부어서는 안 된다, 물엿을 넣어봐라”라는 조언을 듣는다. 이 조언을 토대로 그는 물엿과 고춧가루, 파, 마늘 등을 조합해 새롭고 점도가 있는 붉은 양념을 만들었고, 그 결과는 이전과 전혀 다른 맛의 세계였다.
양념치킨 레시피의 태동과 6개월의 시행착오
윤종계는 이후 양념의 기본 틀을 잡는 데만 6개월 이상이 걸렸다고 회상했다. 그는 하루에도 여러 번씩 레시피를 바꾸고, 또 바꾸면서 매운맛, 단맛, 짠맛, 점도, 색감의 균형을 맞춰 나갔다. 고춧가루와 물엿이 기본 축이었고, 파와 마늘, 생강 등 향신류를 더해 닭 특유의 비린내를 제거하는 동시에 풍미를 강화했다.
또한 닭 자체의 육질을 개선하기 위해 소금, 설탕, 향신료를 사용한 염지법도 도입했다. 닭을 튀기기 전에 염지액이나 가루 양념으로 미리 간을 해두면, 고기의 조직이 부드러워지고 속까지 간이 배어 퍽퍽함이 줄어든다는 점에 주목한 것이다. 이 염지 개념은 당시 국내 치킨 업계에서는 거의 시도되지 않았던 조리 공정으로, 이후 한국 치킨 조리법의 기본 전처리 단계처럼 자리 잡는다.
무엇보다 그는 양념을 입히면서도 튀김의 바삭함을 살리는 기술적 난제를 풀어야 했다. 양념의 점도가 너무 묽으면 닭에 잘 붙지 않고, 너무 되직하면 튀김 옷이 질어지거나 떡처럼 굳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는 반복된 실험을 통해 양념 온도, 버무리는 시간, 튀김 후 재도포 방식 등을 조정하면서,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면서 양념이 고르게 배는’ 조리 프로세스를 확립해 나갔다.
소비자의 초기 반응과 인식의 전환
흥미로운 점은, 양념치킨이 처음부터 환영받은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치킨 소비자들 상당수는 “치킨은 튀김옷이 깔끔해야 한다”, “손에 기름과 소스가 묻지 않아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고, 붉은 양념에 푹 잠긴 치킨은 다소 난잡해 보이는 음식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윤종계는 방송 인터뷰에서 “초기에는 ‘손에 너무 묻는다’는 이유로 손님들이 꺼렸지만, 나는 ‘묻어도 맛있으면 되는 것 아니냐’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깔끔함보다 맛의 충격, 강렬한 만족감을 앞세우는 전략을 택했고, 곧 입소문이 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매일 40~50팀이 가게 앞에서 대기하는 장면이 연출될 정도로 손님이 몰렸고, 양념치킨은 대구 지역을 넘어 다른 도시에서도 ‘먹으러 찾아오는’ 메뉴가 되었다.
이 시기 양념치킨은 단순히 한 가게의 인기 메뉴가 아니라, 서구형 프라이드치킨을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재해석’한 음식으로 자리 잡아 갔다. 맵고 달콤하며, 기름지지만 산뜻하게 느껴지는 맛의 구조는 이후 K-치킨이 세계적으로 확산될 때까지 이어지는 한국식 치킨 맛의 핵심 코드가 된다.
치킨무의 탄생과 ‘세트 문화’의 시작
윤종계의 또 다른 혁신은 치킨무다. 그는 치킨을 먹을 때 목이 자주 막히고, 기름기가 부담스럽다는 점에 착안해 새콤달콤하면서도 깔끔하게 입안을 씻어주는 곁들이를 고민했다. 그가 처음 시도한 방식은 무와 오이에 식초, 사이다를 섞어 담그는 레시피였고, 이것이 점차 지금과 같은 깍둑 썬 치킨무 형태로 정착했다.
오늘날 한국에서 치킨과 치킨무는 거의 분리해서 상상하기 어려운 조합이며, 이 ‘치킨+치킨무’ 구성이 사실상 윤종계가 만들어낸 표준 세트라고 평가된다. 이후 수많은 프랜차이즈가 유사한 형태의 무 절임을 기본 제공하게 되었고, 해외 진출 K-치킨 브랜드 역시 치킨무를 대표적인 사이드로 내세우며 한국 치킨의 정체성을 함께 수출하고 있다.
맥시칸치킨의 탄생과 프랜차이즈 확장
윤종계는 1985년, 자신이 만든 양념치킨을 기반으로 프랜차이즈 브랜드 ‘맥시칸치킨’을 출범시킨다. 브랜드명은 멕시코와 직접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맵고 시고 달콤한’ 맛의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 선택된 이름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는 체계적인 가맹점 모델을 도입해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전국적으로 1000여 개가 넘는 가맹점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맥시칸치킨은 단지 치킨만 파는 가게를 넘어, 당시로서는 새로운 형태의 외식 프랜차이즈 모델을 제시했다. 표준화된 조리법, 양념 소스의 중앙 공급, 가맹점 교육과 관리 시스템을 갖추면서, 그는 한국 치킨 프랜차이즈 산업의 초석을 놓은 인물로 평가받는다.
또한 그는 국내 최초로 닭고기 TV 광고를 제작하는 등 공격적인 마케팅을 시도했다. MBC 드라마 ‘한지붕 세가족’에 출연했던 배우 이건주를 모델로 기용해 대중적인 인지도를 확보했고, 이 과정에서 치킨이 가족 단위 외식과 야식의 대표 메뉴로 부상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미디어에 드러난 ‘양념치킨 아버지’의 자부심
윤종계는 여러 방송을 통해 자신의 개발 과정을 직접 설명하며 대중에게 얼굴을 알렸다. 2014년 SBS 시사 프로그램과 2020년 tvN ‘유 퀴즈 온 더 블록’의 ‘이거 누가 만들었지?’ 특집은 그의 인생과 양념치킨 개발 스토리를 집중 조명한 대표적인 사례다.
그는 이 프로그램들에서 “양념치킨은 내가 전 세계 최초라고 생각한다”고 말하며 강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동시에, 매일 실패를 반복했던 개발 과정과 동네 손님들의 솔직한 피드백, 그리고 우연처럼 찾아온 할머니의 조언까지, 자신이 걸어온 길을 비교적 담담하게 설명했다.
‘유 퀴즈’에서 그는 한때 “돈을 갈퀴가 아니라 불도저로 쓸어모았다”고 표현할 정도로 사업적 성공을 누렸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행운이 아니라, 인쇄소 부도 이후 바닥에서 다시 시작해 수십 년간 조리법과 사업 모델을 다듬어 온 집착과 실험의 결과라는 점을 보여준다.
사업의 굴곡과 이후 행보
맥시칸치킨은 전성기에는 1700여 개에 이르는 매장을 운영할 정도로 크게 성장했지만, 2000년대 들어 외식 트렌드 변화와 경쟁 심화, 사업 전환 과정의 난관 등으로 어려움을 겪는다. 1988년에는 하림과 육계 공급 계약을 체결해 안정적인 원재료 수급을 도모했지만, 이후 기계 설비 도입과 구조 조정 과정에서 여러 문제에 부딪히며 결국 2003년 전후로 문을 닫게 된다.
이 시기 그는 독일에서 기계를 들여오는 등 새로운 사업 방향을 모색했으나, 외부 환경과 재무 부담을 동시에 견디기 어려웠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럼에도, 이미 양념치킨과 치킨무, 프랜차이즈 모델은 한국 시장에 완전히 뿌리 내린 상태였고, 후발 브랜드들은 이 기반 위에서 서로의 레시피와 마케팅을 변주하며 경쟁하기 시작했다.
‘K-치킨 개척자’로서의 유산
윤종계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은 한국 치킨이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맛과 형식을 갖추도록 만든 ‘원형 설계자’라는 점이다. 고춧가루와 물엿, 파, 마늘, 향신료를 조합한 붉은 양념은 매콤하면서도 달콤하고, 기름진 맛 사이를 적절히 조율해 한국인의 입맛은 물론, 이후 해외 소비자들에게도 호소력 있는 맛의 틀을 제공했다.
치킨무 역시 기름진 치킨과 대비되는 산뜻함을 부여하며, ‘기름진 메인+산뜻한 피클’이라는 조합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만든 발명에 가깝다. 지금도 해외 K-치킨 매장에서 치킨무가 하나의 상징처럼 제공되고 있다는 점은, 그의 아이디어가 국경을 넘어 소비자 경험의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언론은 그를 “양념치킨의 아버지”, “치킨무 개발자”, “K-치킨 개척자” 등으로 부르며 한국 외식 산업에서의 상징성을 강조한다. 양념치킨이 단일 메뉴를 넘어, 한국형 치킨 문화의 출발점이자 한류 음식의 중심축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그의 공은 부정하기 어렵다는 평가다.
별세와 뒤늦게 알려진 죽음
윤종계는 2025년 12월 30일, 경북 청도 자택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74세였다. 그의 별세 소식은 2026년 1월 초 언론 보도를 통해 뒤늦게 알려졌고, 그제서야 많은 이들이 “우리가 늘 먹던 양념치킨을 만든 사람이 누구였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보도 이후 각종 기사와 방송은 그가 작은 2평 가게에서 시작해 전국 프랜차이즈를 일군 과정, 그리고 양념치킨·치킨무라는 일상의 메뉴가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다시 조명했다. 많은 네티즌과 소비자들은 “그의 양념치킨을 한 번도 안 먹어본 사람은 있어도, 그가 만든 방식을 계승한 양념치킨을 안 먹어본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반응을 남기며 그의 업적을 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