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평택에 ‘초대형 1c D램 공장’ 여는 이유

삼성전자가 차세대 고대역폭메모리(HBM4) 수요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경기 평택 4공장(P4)을 사실상 ‘HBM4 전용 기지’로 키우고 있다. 인공지능(AI) 반도체 시장의 판도를 가를 HBM4 경쟁에서 기술력과 생산능력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겠다는 승부수다.

P4에 1c D램 라인 집중…1년 새 170% 증설

삼성전자는 평택 P4를 중심으로 10나노(㎚)급 6세대(1c) D램 생산량을 현재보다 약 170% 늘리는 설비 투자 계획을 세웠다. 지금까지 삼성전자의 1c D램 생산능력은 웨이퍼 투입량 기준 월 7만 장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회사는 내년 1분기까지 이 능력을 월 10만~12만 장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신규 라인을 갖추겠다는 목표를 내부적으로 확정한 상태다. 단기간에 1c D램 전담 라인을 대폭 늘려 HBM4 양산에 필요한 ‘기초 체력’을 만들어 놓겠다는 계산이다.

P4에 새로 구축되는 생산라인은 1c D램 장비로만 100% 채워지는 것이 특징이다. 통상 메모리 라인은 세대별 D램, 낸드플래시 등 제품군이 섞여 있는 경우가 많은데, P4는 HBM4용 1c D램에 초점을 맞춘 ‘단일 목적 공장’에 가깝게 설계되고 있다. HBM4 수요가 본격화되기 전에 생산기반을 최대한 먼저 확보해 반도체 수요 사이클 변동에 따른 리스크를 최소화하려는 전략으로 해석된다.

HBM4, AI 가속기 승부 좌우하는 ‘핵심 부품’

삼성전자가 1c D램 증설에 올인하는 배경에는 HBM4의 전략적 위상이 있다. HBM은 여러 개의 D램을 수직으로 적층해 만든 메모리 반도체로, 단일 D램 대비 속도가 빠르고 용량이 커 복잡한 연산을 수행하는 AI 서버에 필수적으로 들어가는 부품이다. GPU, NPU 등 AI 가속기가 아무리 고성능이라도 HBM 대역폭과 용량이 받쳐주지 못하면 전체 시스템 성능이 병목 현상을 겪을 수밖에 없다.

HBM4는 이러한 HBM 계열 가운데 차세대 제품으로, 엔비디아와 AMD 등 글로벌 빅테크가 차세대 AI 가속기에 채택할 ‘간판 메모리’로 꼽힌다. 삼성전자는 최첨단 1c D램 12개를 수직으로 쌓아 HBM4를 만든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이 HBM4 패키지가 향후 엔비디아와 AMD의 주력 AI 가속기에 탑재되면, 메모리 업체로서 삼성전자가 거둘 수 있는 수익성과 영향력은 지금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커질 수 있다.

지난달 삼성전자가 엔비디아의 ‘HBM4 퀄(qualification·품질 승인) 테스트’를 통과한 것은 시장의 시선을 단숨에 바꿔놓은 이벤트였다. HBM 3세대 제품에서 경쟁사에 비해 승인 일정이 늦어 고전했던 기억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차세대 HBM4에서 엔비디아의 문턱을 가장 먼저 넘어섰다는 점은 상징성이 크다. 삼성전자는 이 퀄 통과를 기점으로 양산 물량 출하를 본격화하기 위해 1c D램 생산능력 확대에 속도를 내고 있다. 회사가 “올해 설비 투자를 상당히 공격적으로 할 것”이라고 밝힌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전체 D램 생산의 24%까지…‘규모의 경제’로 승부

이번 증설이 완료되면 삼성전자의 전체 D램 포트폴리오 안에서 HBM4용 1c D램이 차지하는 비중도 단숨에 커지게 된다. 현재 삼성전자의 전체 D램 생산능력은 웨이퍼 투입량 기준 월 66만 장 수준으로 추산된다. 평택 P4 증설을 통해 HBM4용 1c D램 라인이 완전히 갖춰질 경우, 이 중 최대 12만 장 정도가 추가되면서 1년 만에 전체 D램 생산능력이 약 18% 늘어난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이미 웨이퍼 월 6만~7만 장 규모의 HBM용 1c D램 라인을 마련해 둔 것으로 업계에 알려져 있다. 여기에 올해 P4 증설이 더해지면 HBM4용 1c D램 웨이퍼만 월 19만 장 수준까지 올라갈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전체 D램 생산능력 중 약 24%를 HBM4용 1c D램에 할당하는 셈이다. 고부가가치 제품인 HBM4 비중을 빠르게 확대해 수익성을 끌어올리는 동시에, ‘규모의 경제’를 기반으로 원가 경쟁력까지 확보하겠다는 의도가 읽힌다.

업계에서는 이번 1c D램 증설 프로젝트에 들어가는 투자 규모를 두고 “수십조원 단위에 이를 것”이라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메모리 업황의 회복세가 아직 완전히 자리 잡지 않은 상황에서 이 정도 규모의 투자를 단행한다는 것은, 삼성전자가 HBM4와 AI 메모리 시장 구도를 상당히 공격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P4·S5·P5까지…평택을 ‘HBM 허브’로

HBM4 생태계 확장을 위한 삼성의 투자는 P4에만 그치지 않는다. HBM4 패키지의 가장 밑단에 위치해 메모리와 GPU를 연결하는 역할을 하는 시스템 반도체, 이른바 ‘베이스다이’ 생산라인도 함께 가동률을 끌어올리는 중이다. 베이스다이는 HBM 스택 전체의 신호 전달과 전력 공급을 담당하는 핵심 부품으로, 공정 난도가 높은 첨단 로직 반도체에 속한다.

삼성전자는 평택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라인인 S5에서 4나노(㎚) 공정을 적용해 베이스다이를 생산하고 있는데, 이 라인이 최근 ‘풀가동’ 체제에 들어간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HBM4 패키지의 상단에서 메모리를 담당하는 1c D램과, 하단에서 ‘두뇌’ 역할을 하는 베이스다이를 모두 평택 단지에서 처리할 수 있게 되면서, 삼성전자는 HBM 밸류체인을 한 곳에 모아두는 셈이 된다. 이는 공정 효율성과 물류·관리 비용 측면에서 유리할 뿐 아니라, 고객사와의 협업에서도 보다 빠르게 대응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

평택 사업장 내 신규 공장인 5공장(P5) 외관 공사도 속도를 내고 있다. 이르면 내년 1분기부터 반도체 제조 장비 입고가 가능하도록 일정을 맞추고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P4·S5·P5로 이어지는 평택 단지 전체를 HBM4 및 차세대 메모리·파운드리 ‘허브’로 삼겠다는 삼성의 장기 그림이 서서히 구체화되고 있는 셈이다.

‘HBM 트라우마’ 털고…전영현의 반전 시나리오

삼성전자 안팎에서는 “HBM을 포함한 D램 기술력이 정상 궤도에 복귀했다”는 평가가 조심스럽게 흘러나온다. 삼성전자는 2023년부터 지난해까지 HBM 시장에서 난항을 겪었다. 경쟁사 대비 엔비디아 품질 테스트 통과 시점이 늦어지면서, 고부가 HBM 물량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그 여파로 AI 메모리 시장의 초기 ‘치킨게임’에서 한발 뒤처졌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반전의 계기는 2024년 5월 반도체(DS) 부문장을 맡은 전영현 부회장에서 시작됐다는 분석이 많다. 그는 HBM4에 들어갈 1c D램 구조를 재설계하는 강수를 던졌고, 당시에는 일정 지연 리스크를 감수해야 하는 모험이라는 시선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선택이 기술 경쟁력 회복의 출발점이 됐다. 재설계에 따른 초기 부담을 넘어서면서 지난해 하반기부터는 수율과 성능이 빠르게 개선됐고, HBM4 퀄을 가장 먼저 통과하는 성과로 이어졌다.

엔비디아가 주도하는 AI 반도체 시장에서 HBM4는 ‘다음 라운드’ 승부를 가르는 키(key)다. 삼성전자는 세계 1위 D램 생산능력과 충분한 자본력을 앞세워, 기술력에서 회복한 자신감을 설비 투자로 연결하고 있다. HBM4 테스트를 가장 먼저 통과한 데 이어 대규모 양산 체제를 남보다 빨리 구축한다면, 경쟁사들이 뒤따라오는 구조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범용 D램까지 1c로…가격·수요가 만든 ‘전환 압력’

삼성전자의 1c D램 증설은 HBM4용에 국한되지 않는다. 서버와 AI폰 등 광범위한 수요처에 들어가는 범용 D램에서도 1c 비중을 키우려는 계획이 함께 추진되고 있다. 최근 메모리 업체들이 일제히 HBM 라인에 인력과 장비를 집중하면서, 상대적으로 범용 D램 공급이 빠듯해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그 결과 서버용 D램과 같은 범용 제품의 기가비트(Gb)당 가격이 HBM과 크게 다르지 않을 정도로 치솟는 이례적인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이런 환경에서는 범용 1c D램 생산량을 늘리는 것만으로도 수익성을 상당 부분 개선할 여지가 생긴다. 삼성전자가 공정 전환 투자를 병행해 구형 D램 생산 라인을 1c 공정으로 바꾸려는 이유다. 업계에 따르면, 삼성은 화성 사업장에 위치한 17라인을 중심으로 구형 D램 공정을 대폭 1c D램으로 전환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낡은 설비에 최소한의 업그레이드를 가해 생산성을 끌어올리는 ‘라인 리프레시(line refresh)’ 전략이 함께 적용될 가능성도 거론된다.

범용 D램에서의 1c 확대는 HBM4 라인 증설과 맞물려 시너지를 낼 수 있다. 동일한 공정 기술과 장비를 다양한 제품에 공유하면서 원가 구조를 개선할 수 있고, 수요 상황에 따라 HBM4용과 범용용 비중을 탄력적으로 조정하는 것도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메모리 사이클 특유의 가격 변동성을 완화하는 안전판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삼성의 1c ‘풀스택’ 전략은 단기 수익과 장기 경쟁력 모두를 겨냥한 포석으로 볼 수 있다.

AI 슈퍼사이클 겨냥한 ‘선제 투자’ 시험대

결국 삼성전자의 P4 1c D램 증설은 AI 슈퍼사이클을 바라보고 벌이는 선제 투자다. AI 모델의 파라미터 수와 학습·추론 규모가 기하급수적으로 커지는 상황에서, HBM4와 같은 고대역폭 메모리에 대한 수요는 중장기적으로 꾸준히 늘어날 공산이 크다. 문제는 시장의 실제 성장 속도가 삼성의 기대를 얼마나 따라줄지, 그리고 경쟁사들이 언제 어떤 속도로 추격에 나설지다.

단기간에 수십조원대 투자를 집행하는 만큼, 메모리 업황 변동과 고객사 주문 패턴 변화에 따른 리스크도 만만치 않다. 다만 삼성전자는 과거 D램·낸드 슈퍼사이클 국면에서 ‘가장 먼저 투자하고, 가장 많이 깔아놓은 업체가 끝에 웃는다’는 경험을 여러 번 체득해왔다. 이번에도 HBM4 전환기에서 같은 패턴을 재현할 수 있을지가 관전 포인트다.

엔비디아의 HBM4 퀄을 가장 먼저 통과하며 기술 경쟁력에 대한 의구심을 어느 정도 털어낸 삼성전자는 이제 ‘물량과 시점’이라는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풀어야 한다. 평택 P4에서 시작되는 대규모 1c D램 증설이 향후 AI 메모리 시장의 판도를 어디까지 뒤흔들지, 글로벌 반도체 업계의 시선이 평택으로 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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