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

쪽방촌의 슈바이처 선우경식

선우경식은 평생을 도시 빈민과 노숙인, 쪽방촌 주민에게 바친 가톨릭 의사로, ‘영등포·쪽방촌의 슈바이처’라는 별칭을 얻은 인물이다.

유년기와 엘리트 코스, 그리고 ‘안락한 삶’의 포기

선우경식은 1945년 7월 31일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비교적 부유하고 독실한 가톨릭 집안이었고, 어린 시절부터 신앙 안에서 자라며 “능력을 받으면 약한 이웃을 위해 써야 한다”는 분위기 속에 성장했다는 증언이 남아 있다. 해방과 전쟁, 분단의 격랑 속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뒤 그는 서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에 진학해 당대 기준으로 가장 엘리트 코스를 밟는다. 1969년 의대를 졸업한 뒤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브루클린의 킹스브룩 유대인 메디컬센터에서 내과를 전공하며 전문의를 취득했고, 한국으로 돌아와 한림의대 교수와 대형 병원 내과장으로 일하며 안정된 자리와 미래를 거의 보장받은 의사였다.

이력만 놓고 보면 그는 국내 일류 중·고교, 의대, 미국 수련, 대학교수, 병원 내과장이라는 전형적인 ‘상승 경로’를 가진 성공한 내과 전문의였다.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 자가용을 타고, 강남에 집을 마련하는 삶도 충분히 선택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의 이후 선택은 더 극적으로 대비된다. 주변 동료들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이미 교수 시절부터 “몸이 더 약한 사람, 사회에서 밀려난 사람”에게 시선이 오래 머무는 사람이었고, 주말마다 무료진료 봉사를 다니면서 점점 ‘커리어’보다 ‘소명’에 무게를 두기 시작했다고 한다.

신림동 철거민촌과 ‘요셉의원’의 탄생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꾼 전기는 1980년대 초반 시작된 의료 봉사였다. 1982년 강원도 정선의 성프란치스코의원에서 봉사를 시작한 뒤, 1983년부터는 서울 신림동 철거민촌에 있던 ‘사랑의 집’ 진료소에서 의료봉사를 이어 갔다. 이곳은 도시 개발 과정에서 밀려난 철거민과 쪽방촌 거주자들이 모여 살던 공간으로, 감염병과 만성질환, 알코올 의존, 영양실조가 뒤섞인 ‘복합 빈곤’ 현장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평일에는 교수와 병원 내과장으로 일하고, 주말에는 판잣집 골목을 다니며 환자를 돌보는 생활을 반복했다.

이 경험은 그에게 “병원이 아니라 사람이 우선”이라는 확신을 심어 주었다고 전해진다. 결국 그는 교수직과 안정된 병원 자리를 내려놓고, 도시 빈민과 노숙인만을 위한 진료소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1987년, 동료 의사들과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가톨릭교회의 도움을 받아 서울 관악구 신림1동 동사무소 자리에 무료 진료소 ‘요셉의원’을 설립한다. 자신의 세례명인 ‘요셉’을 딴 이 의원은 가톨릭사회복지회 부설 자선의료기관으로, 진료비를 받지 않고 노숙인·쪽방촌 주민·외국인 노동자 등에게 문을 열었다.

영등포 쪽방촌으로, ‘슈바이처’라는 별칭이 붙기까지

요셉의원은 이후 영등포 역세권 뒤편 쪽방촌으로 자리를 옮기며 본격적으로 도시 최하층을 위한 병원이 된다. 영등포역 대형 백화점과 마트 뒤편으로 한 골목만 들어가면, 1960년대식 허름한 건물과 폭 1~2m 남짓한 골목에 쪽방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풍경이 펼쳐졌다. 이곳은 비좁은 방에 하루하루를 버티는 쪽방 주민들과 거리에서 노숙하는 이들이 뒤섞여 살며, 질병·알코올 의존·정신질환·고독사가 일상처럼 있는 곳이었다.

선우경식은 이 공간 한가운데에서 요셉의원을 운영하며, 20여 년 동안 40만 명이 넘는 환자를 돌봤다. 일부 언론과 의료계 기록에서는 그가 무료로 치료한 환자가 42만 명에 달한다고 전하고,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요셉의원은 영등포 쪽방촌에서 28년간 누적 60만 명을 돌봤다는 통계가 나온다. 환자 구성은 결핵·간질환·호흡기 질환·당뇨 같은 만성질환에 시달리는 노숙인, 밀린 월세와 질병 때문에 방에서 거의 나오지 못하는 쪽방 주민, 산업현장에서 다치거나 과로로 쓰러진 외국인 노동자 등이었다.

그는 평생 자가용 한 번 갖지 않았고, 작은 진료 가방 하나와 외투를 들고 대중교통으로 출퇴근하면서 환자를 만나러 다녔다. 결혼도 하지 않은 채 독신으로 살며, 자신에게 들어오는 수입과 후원금 대부분을 의원 운영과 환자 돌봄에 썼기 때문에, 주변에서는 “세속적 성공을 스스로 포기한 사람”이라고 회고한다. 이러한 삶의 방식은 아프리카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친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삶과 겹쳐 보였고, 언론과 환자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영등포의 슈바이처’, ‘쪽방촌의 슈바이처’라는 별칭이 붙었다.

진료실 안팎의 돌봄, ‘밥·목욕·이발’까지 챙긴 의사

선우경식의 의료는 진료실 안에서 끝나지 않았다. 의사신문 등 여러 기록에 따르면, 그는 병든 사람을 데려오면 먼저 따뜻한 밥을 챙겨 먹이고, 옷을 빨아 입히고, 이발과 목욕을 시킨 뒤에야 진료를 시작하곤 했다. 밤에 노숙하다 얼어 죽을까 걱정되는 이들에게는 후원받은 두터운 솜옷과 담요를 입혀 보내고, 퇴원할 때까지 병원에서 쉴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당장 약값보다 배고픔이 더 급한 사람에게는 약 대신 식권과 따뜻한 국밥이 먼저 나갔고, 알코올 의존으로 치료를 반복해서 포기하는 환자에게도 “술 끊고 다시 오라”며 쫓아내기보다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상담과 진료를 이어갔다고 한다.

그가 TV 인터뷰에서 밝힌 보람은 “병이 회복되고 직장에 나가 자립해 다시 찾아오는 사람들을 볼 때”였다. 길거리에서 쓰러져 실려 왔다가 건강을 회복해 일자리를 얻고, 다시 진료실을 찾아와 “선생님 덕분에 멀쩡히 걸어 다닌다,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하느냐”고 말할 때, 그는 자신이 선택한 길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경제적으로 풍요롭지 못했지만, 요셉의원 진료실은 작은 식당·목욕탕·상담소 역할까지 하며, 쪽방 주민과 노숙인들이 “인간으로 대접받는” 몇 안 되는 공간이 되었다.

이런 삶의 방식은 의료계 안팎에서 큰 울림을 불러왔다. 그는 한미참의료인상 1회 수상자로서 위원회 투표에서 만장일치로 선정되기도 했고, 의사 사회에서는 “의료가 가진 윤리적 중심을 보여주는 사람”으로 회자됐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상이나 명예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증언이 많다. 초대 요셉의원장으로서 그는 자신을 내세우기보다, 더 많은 의사와 자원봉사자가 이 길에 동참해 줄 것을 조용히 부탁하는 쪽을 택했다.

갑작스러운 별세와 남겨진 질문들

2008년 4월 18일, 선우경식은 63세의 나이로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직 한창 활동할 나이에 그가 떠나자, 언론들은 “사랑을 남기고 떠난 영등포 슈바이처”, “쪽방촌의 슈바이처를 보내며”라는 제목으로 그의 삶을 조명했다. KBS, 한겨레, 경향신문 등 여러 매체는 20여 년간 40만 명이 넘는 도시 빈민과 노숙인을 무료로 진료한 그의 기록을 전하며, “이 시대에 이런 사람이 또 있을까”라는 물음을 던졌다.

그가 떠난 뒤에도 요셉의원은 동료 의사들과 수녀, 자원봉사자들에 의해 이어졌고, 영등포 쪽방촌에서만 28년 동안 60만 명을 돌본 뒤, 재개발로 인해 서울역 인근으로 이전했다. 쪽방촌 주민들은 의원이 떠나는 날, 가진 것이 없어도 아이스크림·참외·수박·자두·폐지를 팔아 번 5만 원을 건네며 “통닭 사 드시라”고 인사했는데, 이 장면은 선우경식이 생전에 쌓아 올린 관계와 신뢰의 한 단면으로 읽힌다. 그에게서 진료를 받은 이들은 그를 단순한 의사가 아니라, “배고플 때 밥을 주고, 추울 때 이불을 덮어 준 사람”으로 기억하며 지금도 그 이름을 입에 올린다.

그의 삶은 한국 사회에 몇 가지 질문을 남긴다. 첫째, 보건의료 체계가 놓치고 있는 ‘가장 취약한 사람들’을 누가, 어떤 방식으로 책임질 것인가라는 구조적 질문이다. 둘째, 엘리트 코스를 밟은 전문가가 자기 권리와 안락함을 내려놓고,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갈 수 있도록 만드는 동력은 무엇인가라는 개인적 질문이다. 셋째, 그의 이름을 ‘슈바이처’에 비유하며 추앙하는 것만으로 충분한가, 아니면 그가 보여 준 실천을 제도와 정책으로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라는 사회적 질문이다.

최근에는 그의 삶을 다룬 전기 「의사 선우경식」이 출간되어, 남수단의 이태석 신부와 함께 ‘우리 시대의 슈바이처’로 조명되기도 했다. 이 전기는 영등포역 쪽방촌에서 행려병자·노숙인·쪽방 주민을 평생 돌보다 세상을 떠난 한 의사의 선택을 기록하며, “낮은 곳으로,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되묻고 있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선우경식은 화려한 이력의 의사라기보다, 겨울밤 쪽방촌 골목을 누비며 작은 진료 가방 하나 들고 다니던,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큰 사랑을 실천한 한 인간으로 남아 있다.

“이 포스팅은 쿠팡 파트너스 활동의 일환으로, 이에 따른 일정액의 수수료를 제공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