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천리장의 이름과 유래
천리장(千里醬)은 그 이름에 뜻이 담겨 있다. “천 리를 이동해도 맛이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소고기와 전통 간장을 함께 달여 만든 농축 간장이다. 과거 먼 길을 떠나는 선비들이나 군인들이 상하지 않는 양념으로 챙겨가던 지혜가 담긴 장으로, 일반 간장보다 훨씬 진한 농도와 깊은 감칠맛을 자랑하는 것이 특징이다. 냉장 기술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 장거리 여행이나 전쟁터로 나가는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오래 보관되면서도 음식에 깊은 맛을 낼 수 있는 조미료였다. 천리장은 바로 그 실용적 필요에서 탄생한 조상들의 지혜의 결정체였다.
천리장의 재료는 맛이 단 감청장(甘淸醬)과 소고기로, 전통 방식 그대로 살린 감청장의 맛이 우선되어야만 깊은 맛을 살릴 수 있다. 이러한 천리장은 단순한 양념의 차원을 넘어, 한국 전통 음식 문화가 지닌 저장과 발효의 지혜, 그리고 긴 여정을 버티게 해 주는 실용적 음식 철학이 응축된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수백 년 전 종가에서 내려온 이 비법은 근대화와 산업화의 물결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고, 대한민국 식품명인 제50호 윤왕순 명인에 의해 오늘날까지 온전히 보존되고 있다.
2. 윤왕순 명인, 전통 장맛의 수호자
대한민국 식품명인 제50호 윤왕순(76) 씨는 몸이 예전 같지 않은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전통 방식 그대로 장을 담그는 고집을 꺾지 않고 있다. 직접 재배한 우리 농산물과 대둔산의 맑은 물, 깨끗한 공기를 사용하여 조상들이 먹던 그 맛 그대로를 재현해 내고 있으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국가 지정 명인의 반열에 올랐다.
윤왕순 명인은 전북특별자치도 완주군 경천면에 자리한 대둔산 자락에서 대를 이어 내려온 종가의 장 비법을 지켜오고 있다. 윤왕순 명인의 고향인 완주군 경천면은 높은 산이 가로막혀 있지 않아 종일 해가 들고, 또 축사 등의 오염원이 전혀 없어 물이 깨끗하고 맑아 장을 담그는 데 최적의 장소이다. 자연환경 자체가 훌륭한 발효 터전인 셈이다. 좋은 물, 맑은 공기, 풍부한 햇볕은 좋은 장을 담그는 기본 조건이며, 이 모든 것이 경천면 대둔산 기슭에 고루 갖춰져 있다.
좋은 간장을 위해서는 좋은 재료가 필수적으로, 100% 직접 농사지은 해콩과 3~5년 동안 간수를 충분히 뺀 질 좋은 국산 소금을 주재료로 사용해 항아리에 품은 맑은 빛깔과 깊은 향, 그리고 단맛까지 어우러진 구수한 맛의 간장이 탄생한다. 간수를 충분히 빼지 않은 소금은 쓴맛을 내어 장맛을 해친다. 3~5년이라는 긴 세월을 기다리며 소금을 숙성시키는 것 자체가 천리장이 완성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정성과 시간이 투자되는지를 보여준다.
3. 천리장의 제조 과정 — 손끝에서 완성되는 전통의 맛
천리장의 제조는 단순히 재료를 섞는 행위가 아니라, 오랜 경험과 감각이 요구되는 고도의 숙련 작업이다. 천리장의 제조 과정은 다음과 같다. 먼저 조선간장을 센 불로 끓이다가 중간 불로 줄여서 간장이 절반이 될 때까지 조린다. 다음으로 쇠고기 우둔살을 얇게 썰어 채반에 말리고, 삶은 우둔살도 얇게 썰어 채반에 말린다. 이렇게 말린 우둔살을 믹서를 이용해 고운 가루로 낸 후, 반으로 조린 조선간장에 말린 우둔살 가루를 넣고 약한 불에서 타지 않게 잘 조린다.
이 과정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은 바로 불 조절이다. 세게 달이면 간장이 타버리고, 약하게 달이면 농도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수십 년에 걸친 경험으로만 체득할 수 있는 불 조절의 감각이 천리장의 완성도를 결정짓는다. 우둔살을 건조하여 가루로 낸 뒤 간장과 함께 조리는 공정은, 소고기의 단백질과 아미노산이 간장의 발효 성분과 결합하여 훨씬 복잡하고 깊은 감칠맛을 만들어내는 과학적 근거를 지닌다.
완성된 천리장은 일반 간장보다 훨씬 진하고 농도가 높으며, 색도 깊고 윤기가 흐른다. 소량만 사용해도 음식에 깊은 풍미를 더해주는 것이 특징이다.
4. 기반이 되는 전통 간장 — 감청장의 세계
천리장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그 기반이 되는 전통 조선간장, 즉 감청장이 먼저 완성되어야 한다. 대둔산산내골식품의 장독대는 여느 집과 다르게 땅속 깊이 묻혀 있다. 보통의 장독대가 마당 위에 있는 것과 달리, 이곳은 간장독을 땅속 깊이 묻어둔다. 바로 육해공의 귀한 재료를 모두 품은 어육장을 만들기 위해서이다. 땅속의 고른 온도는 발효를 안정적으로 유지시켜 주며, 급격한 온도 변화로 인한 맛의 손상을 막아준다.
감청장의 기반이 되는 콩은 직접 재배한 국산 해콩이다. 해콩이란 그 해에 수확한 햇콩으로, 오래 묵은 콩보다 단백질 함량이 높고 맛이 풍부하다. 이 콩으로 메주를 띄우고, 숙성된 메주를 잘 골라 간수 뺀 소금과 물에 담가 발효시킨다. 수개월에서 수년에 이르는 발효와 숙성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맑고 깊은 색의 감청장이 완성된다. 바로 이 감청장이 천리장의 원재료가 된다. 천리장은 이미 오랜 발효를 거친 전통 간장을 다시 농축하고, 소고기의 풍미를 더해 완성되는 이중적인 가공 과정의 산물이다.
5. 가족과 함께하는 장 담그기의 풍경
장 담그는 날은 온 가족의 축제이자 고된 노동의 날이다. 윤왕순 명인의 동생들은 언니의 거동이 불편해지자 하나둘 모여들어 언니의 손과 발이 되어주고 있다.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빈자리를 대신해 맏언니가 담근 장은 동생들에게 고향이자 친정 같은 존재이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그리운 어머니의 맛을 재현하며 담그는 장에는 가족 간의 애틋한 사랑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천리장은 단순히 상업적으로 생산되는 식품이 아니다. 그 속에는 세대를 이어온 가족의 역사와 정서가 담겨 있다. 어머니에게서 딸에게로, 다시 그 딸이 지역 사회와 나라 전체의 문화유산을 지키는 명인으로 거듭나는 과정은 한국 전통 음식 문화의 전승 방식 그 자체다. 명인은 몸이 불편해진 후에도 동생들의 도움으로 장 담그는 일을 이어가고 있으며, 이 모습 자체가 천리장의 또 다른 가치를 보여준다.
6. 수상 경력과 명인 지정 — 국가가 인정한 전통의 맛
윤왕순 명인이 걸어온 길은 화려한 수상 이력으로 증명된다. 2005년 서울국제요리경연대회에서 발효음식 전통장류 금상을 받았고, 2006년에는 전라북도지사 표창, 2007년에는 농림부장관 표창을 수여했으며, 2013년에는 제3회 전북농업기술원 농식품 가공품 콘테스트 대상을 받았고, 천리장 제조기술로 농림축산식품부장관 지정 식품명인 제50호로 선정되었다.
대한민국 식품명인 제도는 농림축산식품부가 전통 식품의 제조·가공·조리 분야에서 탁월한 기능을 보유한 사람을 선정하여 그 기능을 보존·전수하도록 하는 제도다. 50번째 명인으로 선정된 윤왕순 명인은 그 번호 자체가 한국 전통 식품 문화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상징한다. 단순히 맛있는 장을 만드는 것을 넘어, 수백 년 이어진 전통 제조 방식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현대에도 통용되는 품질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가치는 더욱 높다.
식품명인 50호로 선정된 윤왕순 명인은 천리장을 그대로 재현해 전통의 원형을 복원하는 데 노력하고 있다. 최근에는 천리장을 직접 만들 수 있는 전통 체험장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단순히 제품을 판매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다음 세대가 전통의 맛을 직접 경험하고 배울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한 것이다. 이는 명인의 역할이 생산자에서 교육자, 문화 전승자로 확장되는 것을 의미한다.
7. 천리장의 활용과 현대적 가치
천리장은 그 강렬한 감칠맛과 농축된 풍미 덕분에 다양한 한식 요리에 두루 활용된다. 방송에서는 명인의 장을 활용한 다채로운 요리가 소개되어 감탄을 자아냈다. 어육장 콩비지 돼지등뼈탕은 어육장의 깊은 감칠맛이 콩비지의 구수함과 어우러져 보약 같은 국물 맛을 냈으며, 천리장 닭무침은 진하게 달여진 천리장으로 무쳐내어 닭고기 본연의 맛을 극대화했다. 달래 어육장과 시래기밥은 향긋한 봄 달래에 어육장 한 스푼이면 열 반찬 부럽지 않은 밥도둑이 완성된다.
국, 찌개, 나물, 조림 등 거의 모든 한식에 활용할 수 있으며, 소량만 넣어도 음식의 감칠맛과 깊이가 확연히 달라진다는 것이 사용자들의 공통된 평가다. 현대인들이 자주 찾는 글루탐산나트륨(MSG) 기반의 조미료가 단순한 감칠맛을 더한다면, 천리장은 발효와 농축의 과정을 통해 수십 가지 아미노산과 풍미 성분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진, 훨씬 입체적이고 깊은 맛을 낸다.
완주 대둔산산내골식품의 어육장과 천리장은 단순한 조미료를 넘어, 우리 조상들이 이어온 발효 과학의 정수이다. 발효 식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K-푸드가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현재, 천리장은 한국 전통 발효 기술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도 손색이 없다.
8. 구매 정보 및 현재 현황
2026년 4월 2일 방송된 KBS1 한국인의 밥상 748회에서는 전북특별자치도 완주군 경천면에서 수백 년의 세월을 이어온 종가의 장맛, 어육장과 천리장이 소개되었다. 방송 이후 천리장에 대한 관심이 다시 한번 높아졌으며, 전통 장류를 찾는 소비자들 사이에서 명절 선물로도 인기가 높다.
나가며 — 천 리를 가도 변하지 않는 것들
천리장은 단순히 오래된 간장이 아니다. 그것은 냉장도 방부제도 없던 시절, 먼 길을 떠나는 이들에게 고향의 맛과 영양을 함께 안겨주던 조상들의 지혜가 응축된 음식이며, 수백 년 한 가문의 손에서 손으로 이어져 내려온 문화유산이다. 고령의 나이에도 꿋꿋이 전통의 방식을 고수하는 윤왕순 명인의 장 담그는 손에서, 천 리 길을 가도 변하지 않는 맛과 함께 전통을 지키는 정신도 함께 익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