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한양행 창업주 유일한(柳一韓, 1895~1971)은 평양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자수성가한 억만장자 사업가’로 성공한 뒤, 그 부와 경력을 내려놓고 식민지 조국으로 돌아와 제약회사 유한양행을 세우고 교육·사회사업·독립운동에 헌신한 기업가이자 교육자, 독립운동가입니다. 한국 경영학계에서는 사리사욕을 버리고 국가와 사회에 봉사한 ‘가장 존경받는 기업가’, ‘한국 기업가 정신의 북극성’과 같은 상징적 인물로 평가합니다.
어린 시절과 미국 유학, 자수성가 과정
유일한은 1895년 평양에서 상인 유기연과 어머니 김확실 사이의 9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가세가 기울면서 가족은 새로운 활로를 모색해야 했고, 선교사와의 인연 속에서 유일한은 일찍부터 서양식 교육과 기독교 문화에 접했습니다. 1904년, 불과 열 살 무렵 그는 미국 선교사를 따라 홀로 미국으로 건너가는데, 당시 조선인으로서는 극히 이례적인 유소년 유학이자 사실상 이민에 가까운 선택이었습니다.
미국에 도착한 이후 그는 학비와 생활비를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고학생으로 성장했습니다. 신문 배달, 허드렛일, 통역과 같은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고, 이런 경험은 이후 ‘근검·자조·자립’이라는 그의 가치관에 깊게 새겨졌습니다. 그는 미시간대학을 거쳐 캘리포니아대학에서 상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스탠퍼드대학원에서 법학도 수학하는 등 미국 명문대 교육을 밟으며 경영과 법, 회계에 대한 체계적 지식을 쌓았습니다.
학업을 마친 뒤 전자회사 사원으로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했지만, 월급쟁이보다는 스스로 사업을 일구는 길을 선택합니다. 1922년 그는 숙주나물(몬지빈 스프라우트)을 가공·통조림화해 판매하는 ‘라초이식품주식회사(La Choy Food Products Co.)’를 창업합니다. 아시아 식재료에 익숙지 않던 미국 시장에 중국·동양식 식품을 표준화·대량생산 방식으로 공급한 이 회사는 빠르게 성장했고, 1925년까지 약 50만 달러에 이르는 거액을 벌어들였다고 전해집니다. 당시 가치로는 ‘억만장자’에 비견될 만한 자수성가형 성공이었습니다.
독립운동과 ‘한인자유대회’
3·1운동이 일어나던 1919년, 미국에 있던 유일한은 경제 활동에만 몰두하지 않고 조국의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합니다. 1919년 4월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한인자유대회(Conference of Korean Liberty)’에서 그는 실무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며 대회 운영을 이끌었고, 대회 결의문을 영어로 낭독한 인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위원회는 유일한, Henry Kim, Miss Joan Woo 세 사람으로 구성되었으며, 유일한은 이 대회를 통해 국제사회에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호소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이후에도 미주 한인사회 네트워크를 활용해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고, 외교·여론전에 기여한 기업가형 독립운동가였습니다. 미국 유학과 경제 활동을 통해 쌓은 인적 네트워크와 영어 능력은 한국 독립 문제를 국제무대에 알리는 데 중요한 자산이었습니다. 이런 경험은 이후 그가 기업을 세울 때도 ‘기업은 이윤을 넘어 사회와 민족에 봉사해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으로 이어졌습니다.
귀국과 유한양행 설립
라초이식품 성공으로 안락한 미국 생활을 누릴 수 있었음에도, 유일한은 1920년대 중반 근본적인 결단을 내립니다. 식민지 조국의 보건·위생 환경이 열악하다는 사실과, 약품과 의약품 공급이 일본과 외국자본에 종속된 현실을 바꾸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귀국을 결심한 것입니다. 1926년 3월 결혼을 마친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으로 돌아왔고, 그해 12월 ‘유한양행(柳韓洋行)’을 설립합니다.
유한양행은 한국 최초의 근대적 제약회사 가운데 하나로, 초기에는 수입 의약품을 취급했지만 점차 자체 개발·생산 능력을 키워나갔습니다. 1934년에는 독일에서 개발된 획기적인 항균제 ‘프론토질(Prontyl)’, 즉 설파제 계열 약품을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도입하면서 국내 감염성 질환 치료에 큰 변화를 가져옵니다. 이는 당시 조선의 보건 수준과 의료 접근성을 고려할 때 상당히 진취적인 결정이었습니다.
유한양행은 이후 유럽 제약사들과 기술 제휴를 확대하고, 경기도 부천 소사에 공장을 세워 본격적인 의약품 국산화와 대량생산 체제를 갖추기 시작합니다. 그는 회사 형태를 주식회사로 전환하고, 사상 최초로 종업원 지주제를 도입하는 등 한국 기업사에서 보기 드문 선진적 경영 제도를 실험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이윤 추구가 아니라 ‘노동자와 함께 성장하는 기업’, ‘국민 건강을 위한 기업’이라는 가치 지향이 경영 구조에 반영된 사례였습니다.
경영 철학과 기업문화, 사회공헌
유일한의 경영 철학은 ‘정도(正道) 경영’과 ‘사회적 책임’을 중심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는 기업의 존재 이유를 “국가와 사회에 이로운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하고, 구성원의 삶을 향상시키는 것”으로 보았고, 개인적 부의 축적에는 비교적 냉담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사리사욕을 버리고 공익을 우선하는 그의 태도 때문에, 한국의 많은 경영학자와 기업인들이 그를 ‘기업가 정신의 북극성’에 비유합니다.
그는 직원 복지와 교육을 특히 중시했습니다. 종업원 지주제를 통해 직원에게 회사 성장의 과실을 나누어 주었고, 사내 교육과 장학사업을 통해 직원 개인의 역량 향상을 지원했습니다. 또한 가난한 학생을 위한 장학금, 지역사회 의료·보건 사업 후원, 각종 사회단체 지원을 통해 기업의 이익을 다시 사회에 환원하려 했습니다.
이와 같은 철학은 그의 유언과 사후 재산 처리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그는 사망에 앞서 자신의 지분을 가족에게 세습하기보다, 재단과 회사, 사회에 환원하도록 설계했습니다. 자녀에게 경영권을 물려주지 않고 전문경영인에게 사장직을 승계하게 한 조치 역시, 한국 재벌 역사에서 매우 예외적이며 “재벌이 되기를 스스로 포기한” 사례로 자주 언급됩니다.
일제강점기 말기, 일시적 미국 귀환과 재도약
1930년대 후반, 일본이 국가총동원법을 공포하며 전시체제를 강화하고 미국인과 미국 연고 인사들을 축출하는 과정에서 유일한도 타격을 입습니다. 당시 그는 미국 시민권자 신분이었기에 일본 당국의 감시와 제약을 받았고, 결국 1938년 가족과 함께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는 도피라기보다, 유한양행의 기반을 지키고 전쟁 이후를 준비하는 과도기적 선택에 가까웠습니다.
광복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한국 사회는 피폐해졌지만, 의약품 수요와 보건 인프라의 필요성은 더 커졌습니다. 유일한과 유한양행은 이러한 상황에서 의약품 공급과 대외 협력을 통해 국내 의료 체계 회복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그는 1960년대 후반까지 경영 일선에서 회사를 이끌며 유한양행을 국내 1위 제약사로 성장시켰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1969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면서 그는 자녀가 아닌 회사 임원에게 사장직을 넘겨주었고, 이는 한국 기업사에서 ‘가족세습 구조의 대안’으로 상징적으로 회자됩니다. 이처럼 그의 경영 퇴진 방식까지도 ‘기업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 사회적 공기(公器)’라는 신념을 실천한 사례로 해석됩니다.
교육자·사회사상가로서의 면모와 평가
유일한은 단지 제약회사 창업자에 머물지 않고, 교육자·사회사상가로서도 활동했습니다. 그는 여러 연설과 기고에서 청년들에게 근면, 정직, 자조 정신을 강조하며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또한 경제적 자유와 기업 활동을 중시하면서도, 그 자유가 ‘공동체에 대한 책임’과 결합해야 한다는 점을 일관되게 주장했습니다.
그의 사상은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고전적 자유주의를 바탕으로 한 경제적 자유와 재산권을 존중하면서도, 도덕 규범과 사회적 책임, 법치주의를 중시하는 자유보수주의적 기업가 상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특정 이념 레이블보다, 현실 속에서 “착실하게 일하고, 정직하게 돈을 벌어, 사회에 돌려주는” 실천을 우선시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정치적 스펙트럼을 넘어 폭넓은 존경을 받는 인물로 자리 잡았습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유일한 박사의 이름은 유한양행이라는 회사 이름과 함께, ‘기업은 어떻게 있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될 때마다 인용되는 상징으로 기능합니다. 단순히 ‘착한 기업인’이 아니라, 글로벌 경험과 냉철한 경영 감각, 독립운동과 사회사업, 교육에 대한 헌신을 동시에 구현한 보기 드문 사례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