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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N 이 맛에 산다 여수 둔병도 방풍나물

[이 맛에 산다] 섬마을 부부의 방풍나물 수확하는 날

오지 섬, 둔병도를 찾아서

전라남도 여수 앞바다에는 수많은 섬들이 점점이 흩어져 있다. 그 중에서도 ‘오지 섬’이라 불리는 둔병도는 고작 20여 가구만이 모여 사는 아주 작은 섬이다.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이 외딴 섬은 평소에는 조용하고 한적하지만, 봄이 찾아오면 전혀 다른 풍경으로 탈바꿈한다. 섬 전체가 싱그러운 초록빛으로 물들며 넘실거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마치 바다 한가운데 커다란 녹색 보석이 떠오른 것처럼, 둔병도의 봄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장관을 이룬다.

이 초록 물결의 정체는 다름 아닌 방풍나물이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풍(風)을 막아준다’는 뜻을 가진 방풍나물은 예로부터 한방에서 중풍 예방과 치료에 쓰여온 귀한 약초다. 단순한 나물이 아니라 오랜 세월 한약재로 활용되어 온 약초이기에, 그 가치는 일반 채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다. 방풍나물은 3월 말부터 5월까지, 꼭 두 달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만 채취가 허락된다. 그 짧은 두 달을 위해 둔병도 사람들은 1년을 준비하고, 그 두 달의 수확으로 1년을 먹고 산다. 봄의 두 달이 곧 섬사람들의 1년 생계인 셈이다.


씨앗 하나로 섬을 바꾼 남자, 김경수

사실 둔병도가 처음부터 방풍나물의 섬이었던 것은 아니다. 약 20년 전까지만 해도 이 섬은 고구마 농사로 연명하며 극심한 가난을 겪고 있었다. 척박한 섬 환경에서 고구마 하나에 기대어 살아가던 주민들의 삶은 고달프고 팍팍하기만 했다.

그런 섬의 운명을 바꾼 사람이 있다. 바로 마을 토박이인 김경수(82) 씨다. 섬에서 나고 자라며 섬의 땅과 바람을 누구보다 잘 아는 경수 씨는, 어느 날 마을 사람들에게 방풍나물을 키워보자고 제안했다. 처음에는 낯선 작물에 대한 두려움과 반신반의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변화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설득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경수 씨는 포기하지 않고 마을 사람들을 하나하나 설득해 나갔고, 마침내 방풍나물의 씨앗을 섬으로 들여오는 데 성공했다.

그 씨앗 하나가 섬을 바꿨다. 방풍나물은 둔병도의 토양과 해풍 환경에 잘 맞았고, 해를 거듭할수록 섬 전체를 초록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경제적으로도 고구마와는 비교할 수 없는 수익을 가져다주었다. 두 달간의 수확으로 1년을 먹고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씨앗 하나로 섬 전체의 삶을 바꾼 경수 씨는, 둔병도 사람들에게 있어 단순한 이웃을 넘어 섬을 지킨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노는 것 좋아했던 총각과 50년 전의 결혼 이야기

그런데 지금의 듬직하고 책임감 있는 경수 씨의 모습과는 달리, 젊은 시절의 그는 꽤 다른 사람이었다고 한다. 일보다는 노는 것을 좋아했던 자유분방한 총각이었던 것이다. 그런 경수 씨가 지금의 아내, 배남진(80) 씨와 결혼하기까지는 상당한 우여곡절이 있었다.

약 50여 년 전, 두 사람이 결혼을 결심하고 허락을 구하러 갔을 때 집안의 반대가 매우 심했다고 한다. ‘저런 노는 것 좋아하는 사람에게 딸을 줄 수 없다’는 반응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마음은 완고했다. 결국 온갖 반대를 무릅쓰고 백년가약을 맺었고, 그렇게 둔병도에서의 부부 생활이 시작되었다.

세월은 사람을 바꾸기도 하고, 사람이 세월을 이겨내기도 한다. 노는 것 좋아하던 그 총각은, 50년 세월 동안 단 한 번의 큰 사고도 치지 않고 아내의 곁을 묵묵히 지켜온 남편이 되었다. 남진 씨가 그를 ‘마을에 둘도 없는 1등 남편’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방풍나물과 갯벌을 오가는 남진 씨의 하루

봄이 오면 남진 씨의 하루는 쉴 틈이 없다. 방풍나물 수확철이 되면 새벽부터 허리를 숙이고 나물을 따는 일이 시작된다. 방풍나물을 다 따고 나면 쉬는 것이 아니라, 이번엔 갯벌로 나간다. 섬사람 특유의 억척스러움으로 바지락을 캐며 또 하루를 보낸다. 방풍나물 밭과 갯벌을 오가는 그 삶은, 고되지만 섬의 자연이 내어주는 것들로 채워지는 풍요로운 삶이기도 하다.

일손이 느린 남편 탓에 남진 씨는 허리 한 번 제대로 펴지 못하고 일을 해왔다고 웃으며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 말 속에는 원망이 아니라 정겨움이 담겨 있다. 느리더라도 옆에서 함께해 온 남편, 60년 세월을 한결같이 자신의 곁을 지켜온 그 사람에 대한 깊은 신뢰와 애정이 묻어나는 것이다.


경수 씨의 지혜, 40kg 방풍나물을 옮기는 방법

방풍나물 수확에서 빠질 수 없는 장면이 있다. 한 자루에 40kg이 족히 넘는 방풍나물을 어떻게 옮기느냐의 문제다. 40kg이라면 장정도 힘겨울 무게인데, 82세의 경수 씨가 개발해 낸 방법은 기발하다. 바로 판자를 이용하는 것이다.

판자를 경사면에 대고 그 위에 자루를 얹어 미끄러지듯 내려보내는 방식으로, 힘을 최소화하면서도 무거운 짐을 효율적으로 운반할 수 있다. 경사를 이용해 손쉽게 내려놓는 이 아이디어는 오랜 세월 섬에서 몸으로 터득한 지혜에서 나온 것이다. 이를 보는 남진 씨는 “그런 남편이 더 멋있어 보인다”고 말한다. 나이가 들어도 머리를 쓰고, 삶의 방식을 끊임없이 개선하려는 남편의 모습이 여전히 그녀에게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운 것이다.


작은 섬이 품은 보물 같은 삶

비록 20여 가구만이 살아가는 작은 섬이지만, 둔병도가 가진 아름다움은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다. 봄이면 초록빛 방풍나물로 넘실거리는 섬의 풍경, 갯벌에서 살아 숨 쉬는 생명들, 그리고 그 안에서 평생을 함께해 온 부부의 이야기. 이 모든 것이 어우러진 둔병도는, 작지만 결코 작지 않은 삶의 무대다.

씨앗 하나로 섬을 바꾼 남편과, 그 남편 곁에서 허리 한 번 제대로 펴지 못하면서도 60년을 함께 걸어온 아내. 두 사람의 이야기는 거창한 영웅 서사가 아니다. 하지만 그 소박함 속에 진짜 삶의 무게와 온기가 담겨 있다. 방풍나물처럼, 세상의 풍파를 막아주는 서로가 되어 살아온 두 사람의 이야기를 〈이 맛에 산다〉에서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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