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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혜윰길

전북의 아침 공기는 생각보다 서늘하다. 익산역에 발을 내딛는 순간, 사람들은 저마다 배낭의 끈을 고쳐 매고 조용히 숨을 고른다. 오늘 하루, 혹은 1박 2일 동안 이들이 걸어갈 길은 단순한 관광 코스가 아니라, 다섯 개의 종교가 남긴 성지들을 잇는 치유의 순례길, 바로 성지혜윰길이다. 이름부터가 이 여정의 성격을 드러낸다. 종교적 의미가 깃든 ‘성지’와, 생각·사색을 뜻하는 순우리말 ‘혜윰’이 만나 ‘비우고, 채우고, 성찰하는 길’을 표방한다.telltrip+3[youtube]​

출발점은 대개 익산이다. 원불교 중앙총부, 미륵사지, 두동교회, 나바위성당 등 4대 종교문화유산을 축으로 삼아, 하루 혹은 1박 2일 일정의 프로그램이 탄탄하게 짜여 있다. 관광객은 익산역 앞에 집결해 전용 버스에 오른 뒤, 해설사와 함께 각 성지를 천천히 순례한다. 참가비 5만 원 전후에 숙박·식사·입장료·체험비까지 포함된 패키지 상품도 운영돼, 비용 부담을 낮추면서도 밀도 있는 경험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가성비 좋은 힐링 여행’으로 입소문을 타고 있다. 무엇보다 이 여정의 핵심은 특정 종교의 신앙심을 시험하는 순례가 아니라, 각기 다른 신앙의 공간에서 공통된 인간의 질문과 위로를 발견하는 데 있다.naver+4[youtube]​

첫 코스인 원불교 중앙총부에 도착하면 풍경은 갑자기 고요해진다. 넓게 트인 잔디 위, 단정한 건물들이 나란히 서 있고, 종교 시설이라기보다 하나의 작은 캠퍼스 같은 인상을 준다. 해설사는 원불교가 근대 한국 사회 속에서 어떻게 ‘새로운 불교’를 지향했는지, 그리고 이곳 익산이 왜 그 정신의 중심이 되었는지 차분히 설명한다. 참가자들은 법당에 잠시 앉아 눈을 감아 보기도 하고, 달라진 생활 리듬 속에서 내가 무엇을 비워야 할지, 무엇을 새로 채워야 할지 마음속으로 정리해 본다. 혜윰, 즉 생각의 시간이 이곳에서 자연스레 시작된다.hankyung+5

미륵사지에 이르면 시간축은 더 길게 늘어난다. 백제 최대 규모의 사찰 터이자, 동아시아 석탑사 연구의 중요한 유산으로 꼽히는 이곳에서 사람들은 거대한 석탑과 복원된 금당터를 바라보며, 천오백 년 전 이 땅에서 기도했던 사람들의 마음을 상상한다. 한국기행 ‘봄바람 따라 성지길’에서 배우 박상원이 이곳을 걸으며 “누군가에게는 믿음의 길, 또 누군가에게는 치유의 길”이라 표현한 것처럼, 화면으로 보던 장면이 실제 풍경과 겹쳐지며 묘한 감흥을 준다. 가까이서 바라보면 석탑 표면의 작은 균열과 복원 흔적 하나하나가 눈에 들어오고, 무너졌던 탑이 다시 세워지는 과정처럼 내 삶의 균열도 언젠가 복원될 수 있으리라는 조용한 확신이 피어난다.fire888.tistory+3[youtube]​

기독교 성지 구간에서는 분위기가 한층 친밀해진다. 익산 성당면에 자리한 두동교회, 그리고 금강변에 안긴 나바위성당은 한국 초기 선교의 숨결이 남아 있는 현장이다. 나바위성당은 특히 강가의 낮은 언덕 위에 자리해, 강풍에 펄럭이는 깃발과 붉은 벽돌 성당의 조합이 이국적인 동시에 토속적인 정서를 동시에 자아낸다. 참가자들은 성당 내부에서 잠시 머물며 각자의 방식으로 기도하거나, 아무 말 없이 벤치에 앉아 강을 바라본다. 해설사는 조선 시대 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숨어들었던 신앙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믿음이 한 개인을 넘어 지역과 시대 전체에 어떤 흔적을 남기는지 짚어낸다.welfarehello+1youtube+1

성지혜윰길의 무대는 익산을 넘어 전주와 완주, 그리고 충남 공주·논산·부여·예산·청양 등으로까지 확대된다. 전주 한옥마을 인근의 서문교회·전동성당, 동고사와 치명자산성지처럼 서로 다른 종교 시설이 한 도시 안에서 겹겹이 자리한 풍경은 종교의 다양성이 단순한 공존을 넘어, 한 도시의 문화와 일상에 어떻게 녹아 있는지를 보여준다. 완주 구간에서는 위봉사 같은 산사와 천호성지, 교우촌 등 숲과 산 속에 숨은 성지들이 등장해, 숲길을 걷고, 차를 나누고, 싱잉볼 명상에 참여하는 프로그램까지 이어진다. 몸을 쓰며 걷는 일과 마음을 비우는 명상이 한 코스에 엮이면서, 이 길이 단순 종교 관광이 아니라 웰니스 여행으로 기획되었음을 실감하게 된다.youtube+2monthler+3

충남문화관광재단이 운영한 충남 성지혜윰길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공주·논산·부여·예산·청양 5개 시군에 흩어진 기독교·불교·천도교·천주교 자원을 잇고, 매 회차마다 다른 테마의 치유 프로그램을 결합하는 구조다. 다락골성지에서 천주교 순교자들의 줄묘를 따라 걷는 순례, 스님과 함께 하는 비건 쿠킹 클래스, 청양 자연 속에서 몸과 마음을 비우는 비건 여행 등은 종교적 색채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도 부담 없이 참여할 수 있도록 설계된 것이 특징이다. 실제 참가자 만족도가 높게 나타났고, 향후 관광상품화 가능성도 확인되었다는 평가가 나온다.monthler+2

결국 성지혜윰길을 한 줄로 요약하면, “한국의 다종교 성지를 관통하는 치유형 순례여행 플랫폼”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익산시와 충남문화관광재단, 그리고 지역 지자체들이 각자 프로그램을 기획·운영하지만, 공통된 키워드는 언제나 ‘혜윰’, 즉 생각하고 성찰하는 시간이다. 계절마다 코스와 일정, 체험 프로그램은 조금씩 바뀌겠지만, 이 길을 찾는 이들은 여전히 같은 이유로 배낭을 멘다. 바쁜 일상에서 잠시 물러나, 나를 비우고, 낯선 풍경과 오래된 이야기를 통해 다시 나를 채우기 위해서다.naver+4[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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