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삼청동에 자리한 한옥 선혜원은 SK그룹 창업주 고 최종건 회장의 옛 사저가 리모델링을 거쳐, 전통 한옥과 현대미술이 공존하는 복합 문화·연구 공간으로 재탄생한 곳이다.
선혜원의 탄생과 역사적 배경
선혜원은 1968년 SK그룹(당시 선경)의 창업주 고 최종건 회장이 직접 매입해, 생의 마지막까지 거주한 사저에서 출발했다. 이후 이곳은 단순한 개인 주택을 넘어 그룹 연수원과 영빈관으로 쓰이며, 핵심 경영진이 모여 SK의 미래를 논의하던 비공개 공간으로 활용됐다. 재계 그룹의 전략과 인재 교육이 쌓인 장소라는 점에서, 선혜원은 한국 대기업 성장사의 한 단면을 품은 상징적인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선혜원이라는 이름에는 ‘선(鮮)’과 ‘혜(慧)’를 더해 ‘지혜를 베푸는 집’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는 창업주의 사저이자 인재교육의 장이었던 과거의 성격과, 앞으로 사회·문화적 기여를 확대하겠다는 SK의 방향성을 동시에 드러내는 명명이다. 2025년 봄, SK는 이 공간을 기업 연구소이자 시민에게 열린 문화·전시 플랫폼으로 전환하며, 오랫동안 닫혀 있던 문을 처음으로 대중에게 열었다.
양옥에서 세 채의 한옥으로
흥미로운 점은 선혜원이 처음부터 한옥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원 건축은 근대 한국 상류층 주거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양옥 대저택이었고, SKM 아키텍츠와 김봉렬 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가 이끄는 ‘온지음 집공방’ 등이 협업해 이 양옥 위에 세 채의 한옥을 입히는 방식으로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단순한 복원이나 모사에 그치지 않고, 현대 구조 위에 전통 한옥의 비례와 목구조, 마감을 얹어 ‘이종 결합’의 실험을 수행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현재 선혜원에는 경흥각, 하린당, 동여루 세 채의 한옥이 디귿(ㄷ)자 형태로 배치돼 있다. 안마당을 감싸 안는 이 디귿자 구도는 외부의 소음을 차단하고, 내부로 들어오는 빛과 바람을 조절해 한옥 특유의 고요한 내향성을 강조한다. 세 채의 한옥은 현대식 기반 위에 얹힌 만큼 단열·구조 성능은 현대 건축의 장점을 취하면서도, 수백 년 된 소나무 목재를 활용한 구조와 전통 비례감, 처마선 등은 한옥의 미감을 최대한 살리려 했다.
건물 구성: 경흥각·하린당·동여루
선혜원에 들어서면 먼저 보이는 것은 선혜원의 메인 한옥인 경흥각이다. ‘경흥각(京興閣)’이라는 이름은 “경사롭고 흥성하다”는 뜻을 품고 있으며, 그룹의 전신인 ‘선경(鮮京)’과 연결돼 SK의 지속적인 번영과 성장을 기원하는 상징적 의미를 담는다. 건축적으로 경흥각은 수려한 목재 구조와 정제된 마감, 비례감이 뛰어난 지붕선으로 평가되며, 전통 한옥이 가진 품격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대표 공간이다.
경흥각 오른편에는 하린당, 맞은편에는 동여루가 자리한다. 하린당과 동여루는 경흥각과 함께 선혜원의 ‘ㄷ자’ 마당을 구성하며, 각기 다른 방향으로 열려 있어 시각적·동선적 변주를 만든다. 한옥의 툇마루와 포치는 반전된 ㄷ자 형태로 이어져 관람객이 자연스럽게 건물 사이를 회유하도록 유도하며, 실내와 마당, 담장 너머의 삼청동 풍경이 겹쳐지는 다층적 시야를 제공한다. 이처럼 세 건물은 개별 동선과 기능을 가지면서도, 상호 연계된 하나의 큰 작품 같은 구성을 이룬다.
한옥 선혜원의 공간적 특징
선혜원의 큰 매력은 한옥의 고요함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현대적 감각을 녹여 넣었다는 점이다. 높은 담장과 안쪽으로 깊이 들어간 마당은 삼청동 골목의 소음과 밀도를 단번에 차단해, 문턱을 넘는 순간 도시와 분리된 별천지 같은 분위기를 만든다. 배롱나무가 피어 있는 정원과 단정히 다듬어진 마당, 목재 기둥과 서까래로 이루어진 구조는 전형적인 한옥의 정취를 유지하면서도, 실내 조명과 전시 설비, 동선 계획 등은 현대 미술 전시에 적합하게 구성돼 있다.
건축적으로는 전통 한옥의 비례와 목재 미를 강조하면서, 불필요한 장식을 덜어낸 절제된 디테일이 눈에 띈다. 처마 아래로 떨어지는 빛, 마루 바닥으로 스며드는 자연광, 종이창과 유리창이 혼용된 개구부 등은 시시각각 바뀌는 빛의 상태를 공간 경험의 핵심 요소로 만든다. 이런 요소들은 관람객이 작품뿐 아니라 공간 자체를 하나의 거대한 설치 작업으로 받아들이도록 유도하며, 걷고 머무르는 행위가 그대로 감상의 일부가 되게 한다.
예술공간으로의 전환과 아트 프로젝트
SK는 선혜원을 단순한 사적 공간에서 시민에게 열린 예술 플랫폼으로 바꾸기 위해 ‘선혜원 아트프로젝트’를 출범했다. 이 프로젝트의 첫 번째 전시가 바로 세계적인 설치·개념미술 작가 김수자의 개인전 ‘호흡–선혜원’이며, 2025년 9월 3일부터 10월 19일까지 진행됐다. 포도뮤지엄이 기획·운영을 맡은 이 전시는 한국 전통 한옥 전체를 활용한 장소특정적(site-specific) 설치 작업이라는 점에서, 국내에서도 보기 드문 형식의 시도를 담았다.
‘호흡–선혜원’ 전시에서 가장 주목받은 작품은 경흥각 바닥 전체를 거울로 채운 동명의 설치 작업 ‘호흡–선혜원’이다. 수백 년 된 소나무로 짜인 한옥의 천장, 서까래, 지붕선이 거울 바닥에 반사되면서 실제와 허상이 겹쳐지고, 관람객의 신체와 움직임까지 화면 안으로 끌어들인다. 이로써 경흥각은 더 이상 단순한 건축이 아니라, 상하가 전도된 두 개의 세계가 마주 보는 거대한 예술 작품으로 변모한다. 공간 자체가 작품이 되고, 그 속에 들어선 관람객의 시선과 호흡까지 작업의 일부가 되는 구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