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분고분한 여자의 반전 — ‘청순가련 느와르’의 탄생
드라마 ‘고분고분한 킬러’는 제목부터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동안 대중이 ‘고분고분하다’라는 단어에서 떠올리던 이미지는 순종적이고 착한 여성상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그런 전통적인 이미지의 여성이 “소리와 흔적 없이 사람을 없애는 재능”을 발견한다는 파격적인 설정으로 이 개념을 완전히 비튼다. 이 드라마가 내세우는 키워드는 ‘청순가련 느와르’다.
‘청순가련 느와르’란 낯선 조합이지만, 이 작품의 색깔을 가장 잘 설명한다. 느와르는 범죄나 어둠의 세계를 배경으로 하지만, 이 작품은 그 분위기를 1970~1980년대 한국 사회라는 시대적 배경에 녹여낸다. 그 시기는 ‘착한 아내, 고분고분한 딸, 성실한 직장인’이라는 사회적 틀이 여전히 강하게 작동하던 시대다. 주인공은 바로 그 틀의 중심에 서 있던 평범한 여성으로, ‘착한 아내’라는 이름 아래 억눌렸던 본능과 욕망, 자아를 뒤늦게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 자아는 아이러니하게도 ‘인명살상 능력’이라는 형태로 드러난다.
이처럼 작품은 단순한 범죄 느와르가 아니라 여성의 자각과 사회적 각성의 서사를 담은 블랙코미디적 측면도 가지고 있다. 즉,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행위를 통해 ‘자신의 생존’을 되찾는 이야기인 셈이다.
김다미, 다시 총을 든다 — ‘마녀’ 이후의 진화
김다미가 맡은 인물은 고달분이다. 이름부터 의미심장하다. ‘고분고분’이라는 단어를 뒤집은 듯한 이 이름은, 겉으로는 온화하지만 내면에선 끊임없이 고난을 마주하는 인물임을 암시한다. 고달분은 누구보다 가정에 헌신하고, 가정이 전부였던 인물이다. 남편에게 의지하며 평범한 삶을 꾸려왔지만, 어느 날 갑작스러운 이혼 통보를 받고 자신의 존재 이유를 잃게 된다. 유일하게 지켜야 할 건 어린 딸 하나뿐. 딸을 되찾기 위해 선택한 새로운 일터가 바로 ‘여성의 사회진출을 장려한다’는 이상한 회사다. 그런데 그 회사가 실제로는 ‘킬러 조직’이었다는 설정이 드라마의 첫 전환점이 된다.
김다미는 이 작품을 통해 ‘고분고분한 여성’의 허울을 벗고, 그 안에 잠재된 힘과 본능을 드러내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낼 예정이다. 영화 ‘마녀’에서 보여준 듯한 액션과 심리 묘사의 균형감, 그리고 이중적인 감정선을 표현하는 능력이 핵심 관전 포인트로 꼽힌다. ‘고분고분한 킬러’는 김다미가 보여줄 ‘느와르적 여성 서사의 정점’이 될 가능성이 크다.
황금조합 제작진 — 강은경, 주화미, 이정흠의 만남
제작진 라인업도 화려하다. 드라마 ‘낭만닥터 김사부’, ‘경성크리처’로 흥행과 완성도 두 마리 토끼를 잡은 강은경 작가가 크리에이터로 참여한다. 강은경은 주제의식이 분명하고 서사 구조가 탄탄한 작품 세계로 유명한데, 이번 작품에서 여성의 억압과 해방을 느와르적 문법으로 풀어내는 과정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대본은 ‘히어로는 아닙니다만’을 집필한 주화미 작가가 맡았다. 주화미는 리듬감 있는 대사와 현실적인 여성 캐릭터 묘사로 호평을 받아왔다. 이번 작품에서 그녀의 손끝을 타고 탄생할 고달분은 단순한 범죄자도, 단순한 피해자도 아닌, 복합적인 감정을 지닌 입체적인 인물로 그려질 전망이다.
연출은 ‘구경이’, ‘우리 영화’로 독특한 미장센과 인물 중심의 디테일한 연출을 선보였던 이정흠 PD가 맡는다. 특히 ‘구경이’에서도 사회적 약자 또는 비주류 인물이 범죄적 상황에 놓이는 구도를 감각적으로 그려내며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그는, 이번에도 여성 중심 느와르를 자신만의 질감으로 완성시킬 가능성이 높다.
시대적 배경 — 1970~1980년대 여성의 초상
‘고분고분한 킬러’의 또 다른 흥미로운 지점은 시대극이라는 점이다. 1970~1980년대는 한국 사회가 산업화의 고속 성장과 함께 유교적 가부장제가 공존하던 시기다. 여성이 사회로 진출하는 것 자체가 ‘용기’로 간주되던 시절이었다.
그런 시대에 ‘현모양처’를 인생 목표로 삼던 여성이 사회로 나간다는 것, 게다가 ‘킬러’라는 비윤리적 직업을 선택한다는 것은 단순히 범죄극이 아닌 시대에 대한 은유적 비판으로 읽힌다. 당시 여성들의 억눌린 감정, 보이지 않는 폭력 구조, 생존을 둘러싼 선택의 부조리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특히 드라마는 ‘온실 속 화초’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는 보호받는 동시에 통제받는 여성의 위치를 상징한다. 그 화초가 온실 밖으로 나와 바람과 햇빛을 직접 맞으며 스스로 살아남는 과정이 곧 이 작품의 서사적 골격이다.
김다미의 배우 인생에 남을 분기점
김다미에게 이 드라마는 단순한 복귀작이 아니라 배우 인생의 분기점이 될 가능성이 높다. 데뷔작 ‘마녀’에서 신인임에도 강도 높은 액션과 복잡한 감정선을 완벽히 소화하며 해외까지 주목받았던 그녀는 이후 ‘이태원 클라쓰’, ‘그 해 우리는’, ‘소울메이트’ 등에서 다양한 감정의 얼굴을 보여왔다.
그러나 ‘고분고분한 킬러’는 기존의 청춘·로맨스형 캐릭터와는 다른, 훨씬 깊고 어두운 인간 내면의 서사를 다룬다. 김다미가 다시 총을 쥐게 된 이번 작품은 단순한 액션 복귀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것은 ‘폭력’이 아닌 ‘삶의 기술’로서의 생존술, 그리고 여성 주체의 성장 서사로 해석될 수 있다.
기대와 전망
업계는 ‘고분고분한 킬러’를 2026년 하반기 최고 기대작 중 하나로 꼽고 있다. 장르적으로는 느와르이지만, 그 중심에는 사회적 통념과 여성의 자아 찾기라는 철학적 메시지가 자리 잡고 있다. 김다미가 연기할 고달분의 변화, 즉 ‘순종적 아내’에서 ‘자유로운 인간’으로의 여정이 어떻게 묘사될지, 또 그 과정에서 어떤 감정적 카타르시스를 줄지가 시청자들의 첫 관심사가 될 것이다.
‘고분고분한 킬러’는 단순한 범죄 미스터리가 아니라, “착하게만 살던 여자의 생존기”라는 인간 드라마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높다. 김다미의 새로운 얼굴과 제작진의 실험적 시도가 어떻게 조화를 이룰지, K드라마계에 또 하나의 파격적 여성 느와르가 탄생할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