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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한 바퀴 중림동 화장품 공방


인생 2막의 향기, 중림동 공방에서 피어나다

서울 중구 중림동은 오래된 주택가와 세련된 신축 빌딩이 뒤섞인 독특한 동네다. 서울역에서 멀지 않은 이곳은 수십 년 전만 해도 인쇄소와 신문사 직원들이 오가던 노동의 골목이었지만, 요즘은 감각적인 카페와 공방이 하나둘 들어서며 새로운 분위기를 만들어가고 있다. 낡은 벽돌 건물 사이로 흘러드는 커피 향과 비누 향이 묘하게 어우러진다. 그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유리창 너머로 작은 병들이 가지런히 놓인 한 공방이 눈에 들어온다. ‘나만의 향을 담은 화장품, 당신의 피부 이야기’라는 문구가 적힌 이곳은 고재철 씨가 운영하는 맞춤형 화장품 공방이다.

가게 문을 열자 은은한 라벤더 향이 먼저 반긴다. 탁자 위에는 여러 가지 오일과 크림 베이스, 식물 추출물이 가지런히 놓여 있고, 벽면에는 고객들의 만족스러운 후기가 빼곡히 붙어 있다. 그는 손님을 맞으며 환하게 웃는다. “이 향, 직접 맡아보세요. 사람마다 좋아하는 향이 다르거든요. 향에는 그 사람의 삶이 깃들어 있습니다.” 이 한마디에서 그의 직업에 대한 애정과 철학이 묻어난다.

고재철 씨는 원래 20년 넘게 광고회사에서 일한 마케팅 전문가였다. 화려해 보이지만 현실은 늘 쫓기는 삶이었다. 클라이언트의 요구, 마감의 압박, 새로운 트렌드에 대한 끊임없는 학습. 어느 날 문득, 그는 “이 삶을 10년 후에도 계속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회사라는 울타리 없이, 나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라는 고민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50대 초반, 많은 이들이 안정과 은퇴를 동시에 고민하는 나이에 그는 정반대의 길을 택했다.

“처음엔 용기가 아니라 불안이었어요. 하지만 그 불안이 오히려 저를 앞으로 밀어줬죠. 마케팅할 때 제가 가장 흥미로워했던 건 고객을 이해하는 과정이었어요. ‘이 제품을 이 사람이 왜 좋아할까?’를 파고드는 게 재미있었죠. 문득 그걸 나 자신에게 적용해보고 싶었어요. ‘내가 정말 좋아하는 건 뭘까?’ 생각해보니 향과 감각적인 작업이더군요.”

그는 일을 그만둔 후, 곧바로 관련 공부에 돌입했다. 조향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이어서 화장품 조제사 국가자격증 시험에도 도전했다. 처음엔 용어 하나하나가 생소했다. 유화, 점도, pH, 안정성 시험 같은 낯선 단어들이 그를 괴롭혔다. 하지만 그는 마케터 시절부터 익힌 ‘집요한 분석’으로 한 단계씩 돌파했다. 그때의 공부 기록 노트는 아직도 공방 한켠에 남아있다. 빼곡히 적힌 메모와 향 조합 실험 흔적은 그의 새로운 인생의 출발점을 증명한다.

중림동을 새로운 보금자리로 택한 이유를 묻자 그는 이렇게 답한다. “이곳은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게 공존하는 동네잖아요. 저도 그렇습니다. 오래된 경험이 새 일로 이어지는 사람이고 싶었어요.” 실제로 그의 공방 인테리어는 흙빛 벽돌과 나무 선반으로 꾸며져 있는데, 투박하면서도 따뜻하다. ‘새것’보다 ‘익어가는 것’을 닮은 공간이다. 이곳에서는 방문 고객이 자신의 피부 상태를 진단받고, 원하는 향과 촉감에 맞는 크림이나 향수를 직접 만들어 간다.

“사람마다 좋아하는 향은 다 이유가 있어요. 어떤 분은 어린 시절 외할머니 집 냄새를 떠올리며 장미향을 고르고, 또 어떤 분은 긴 회사 생활 끝에 편안함이 느껴지는 머스크 향을 원하죠. 그 순간, 저는 그분들의 이야기를 향으로 번역하는 셈이에요.”

그는 매번 고객과 대화를 통해 ‘생활의 향기’를 찾아내는 과정을 즐긴다. 이런 진심 어린 접근법 덕분에 입소문이 퍼졌고, 지금은 ‘중림동의 향기 공방’이라는 별칭이 생겼다. 요즘은 2030 세대뿐 아니라, 또래 50~60대 고객들도 꾸준히 찾아온다. “저처럼 새로운 걸 시작하고 싶지만 망설이는 분들이 자주 와요. 향수를 만들며 ‘나도 이렇게 해보고 싶어요’라고 말씀하시죠. 그럴 때마다 제가 그분들에게 희망의 사례가 될 수 있다는 게 참 기쁩니다.”

물론 이 자리에 오기까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퇴사 결심을 했을 때 주변의 반응은 냉담했다. “50대에 직장을 그만둔다니, 미쳤다는 말을 제일 많이 들었어요.” 동료들은 걱정했고, 가족들도 처음에는 당황했다. 특히 고3 딸을 둔 아버지로서 경제적 부담이 가장 큰 시기였다. “아내도 무척 힘들었을 거예요. 하지만 내가 정말 이 일을 하고 싶다는 확신을 보여주자, 결국 믿어주더군요.”

그는 퇴근 후에도 공부했고, 새벽마다 향 조합 실험을 반복했다. 어떤 날은 시향 노트가 수십 장이 되었다. “실패가 많았어요. 향이 너무 강하거나, 크림이 분리되기도 했죠.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런 시행착오가 싫지 않았어요. 새로 배우는 기쁨이 컸거든요.”

지금 그의 사업은 아직 작은 규모지만, 고정 고객층이 형성되며 안정적인 수입을 올리고 있다. 중림동 일대의 카페나 소상공인들과 협업해 향 제품을 제작하는 프로젝트도 진행 중이다. “향기와 이야기를 함께 담은 지역 브랜드를 만들고 싶어요. 단순히 제품이 아니라, 이 동네의 정서를 담아내는 걸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그의 하루는 오전 9시 반에 공방 문을 여는 것으로 시작된다. 오전에는 피부 진단 상담이나 시제품 제작을 하고, 오후에는 예약 고객과 함께 화장품을 만든다. 저녁이면 공방 문을 닫고 근처 공원에서 산책을 하며 하루를 정리한다. “예전엔 늘 시간에 쫓겼어요. 지금은 느리게 일하지만, 그게 더 생산적입니다. 내가 만드는 것의 ‘의미’를 느낄 수 있으니까요.”

퇴사 5년 차를 맞은 지금, 그는 ‘성공’보다는 ‘지속’을 꿈꾼다. “이 일을 오래 하고 싶어요. 그리고 저처럼 중년 이후 새로운 길을 고민하는 분들에게 현실적인 용기를 주는 존재가 되고 싶습니다. 중요한 건, 속도보다 방향이에요. 내가 나답게 갈 수 있는 길이라면, 늦어도 괜찮죠.”

중림동 골목을 다시 나서며 뒤돌아보니, 공방의 불빛이 따뜻하게 새어 나온다. 어쩐지 그 빛에는 인생의 향기가 섞여 있는 듯하다.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어깨를 나란히 한 이 동네처럼, 고재철 씨의 인생 역시 그 조화로움 속에서 더욱 깊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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